폐허의 나라, 어디부터 치워야 하나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폭격으로 절반이 무너진 나라를 정리하는 것은 계약 업체들의 평범한 작업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사업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도시의 잔해를 걷어내 재건을 시작하고 사람들이 다시 이동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었고, 붕괴 위험을 없애는 문제까지 감안하면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이 작업에는 급하게 동원된 노동자 부대와 나치 전력이 있는 포로들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독일 여성들이 참여했습니다. 바로 트뤼머프라우엔(Trümmerfrauen), '잔해의 여인들'입니다.
당시 독일에는 약 1,600만 가구의 주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전쟁이 끝날 무렵 그중 4분의 1이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또 다른 4분의 1이 심각하게 손상되었습니다. 학교, 관공서, 공장 등 각종 공공 건물의 피해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것을 합치면 어떤 재건 계획도 착수하기 전에 치워야 할 잔해가 약 4억 입방미터에 달했습니다.

인력 부족과 수작업의 현실
문제는 이 방대한 작업을 합리적인 시간 안에 해낼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민간 업체들이 고용되었지만 필요한 인원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옮겨야 할 물량이 많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중장비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잔해를 치워야 했고, 다음으로 안전하지 않지만 서 있는 건물은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해체해야 했습니다. 벽돌을 재활용하려면 하나하나 떼어내야 했고, 물자가 극도로 부족했기 때문에 들보, 변기, 배관 같은 자재를 회수하는 일도 필수적이었습니다.
작업 전반은 거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곡괭이와 도르래, 수동 윈치로 잔해를 다룬 뒤, 사람 사슬을 이루어 트럭이나 노새 수레까지 운반했습니다. 이 인적 사슬의 상당 부분을 여성들이 차지했는데, 죽거나 다치거나 실향한 남성이 워낙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최대 700만 명 더 많았고, 그중 상당수는 의지할 곳 없이 아이들을 홀로 키우는 미망인이었습니다.
트뤼머프라우엔의 탄생
그래서 연합군은 15세에서 50세 사이의 독일 여성들을 이 청소 작업에 동원했습니다. 독일 법은 원래 여성의 육체노동에 제한을 두고 있었지만, 나치 정권이 붕괴하면서 1946년 7월부터 그 법률은 무효화되었고, 기업들은 이른바 트뤼머프라우엔(단수형 트뤼머프라우)이라 불리게 된 여성들을 고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지원한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도시 곳곳에 구역을 배정받은 작업반에 배속되었습니다.

물론 대다수는 급여를 받았습니다. 급여의 일부는 현금(당시 화폐 체계인 마르크가 1948년에야 도입되었기 때문에 6라이히스마르크 48펜니히)으로, 나머지는 식량으로 지급되었습니다. 시급은 약 72펜니히였고, 하루 근무 시간은 약 9시간, 식사를 위한 휴식은 20~30분이었다고 합니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현금과 식량을 합치면 배급표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생계를 보완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빵 한 덩이에 80라이히스마르크가 들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 사슬과 잔해의 재탄생
트뤼머프라우엔과 남성 동료들은 10~20명 단위의 콜로네(Kolonne), 즉 열(列)로 조직되어 앞서 말한 사람 사슬을 형성했습니다. 이렇게 운반된 자재 중 상태가 양호한 것은 벽돌을 골라냈고, 깨지거나 재활용할 수 없는 조각들은 쌓아두었다가 크게 파손된 도로의 움푹한 곳이나 폭발로 생긴 크레이터를 메우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일부 독일 도시에는 그 시절 잔해 산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잔해'를 뜻하는 트뤼머(Trümmer)라는 단어는 당시 어휘 곳곳에 등장합니다. 예컨대 잔해를 실어 나르던 열차는 트뤼머바넨(Trümmerbahnen)이라 불렸습니다.
트뤼머프라우엔의 활약은 베를린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독일 전역의 여러 도시와 이웃 오스트리아에서도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고, 이들의 헌신은 훗날 다양한 형태로 기려졌습니다. 기념 명판과 동상은 물론, 우표 발행, 역사 연구, 전시회 등 그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수년간 짊어져야 했던 다소 좋지 못한 이미지를 만회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 이미지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던 경우도 있지만, 모든 일반화가 그렇듯 과장된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왜 나쁜 이미지가 따랐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생존 본능입니다. 다른 글에서 소개한 늑대 아이들(wolfskinder, 전란 고아)처럼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은 잔해를 나르러 나갔다가 집 안에서 발견한 물건들을 몰래 챙겨 나와 팔아 용돈을 벌곤 했습니다. 대충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대상이 되었지만, 특히 자기 옷 밑에 숨기기 쉬운 의류나 각종 천 조각들이 선호되었습니다. 이런 천들은 재단사에게 가져가 룸펜클라이더(Lumpenkleider), 즉 넝마천 옷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의류는 극심한 품귀 상태였습니다. 굶주림을 견디기 위해 여성들은 거의 모든 재산을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다리에 색을 칠해 스타킹을 신은 듯 꾸민 관습이 유명합니다). 그럼에도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 전쟁 전의 생활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갈구했고, 여기에는 일정한 미적 관심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룸펜클라이더는 팔아서 부수입을 올릴 수도 있었습니다.
요컨대 패션이 다시 태어난 것이지만, 전후의 초라함 속에서도 분명 패션이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는 두 번째 이유, 즉 연합군 병사들과의 프래터나이제이션(친교 행위)으로 이어집니다. 프로일라인(Fräulein)은 원래 '아가씨'를 뜻하지만, 이 맥락에서는 병사와 관계를 맺은 여성들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전쟁 중에는 금기시되던 일이었지만, 전쟁 후 홀로 남겨진 여성들에게는 식량을 얻거나 극한의 상황에서 보호를 받는 수단이 되면서 빈번해졌습니다.

당연히 외모가 뛰어난 여성일수록 유리했고, 그래서 몇 년 동안 미트게브라흐텐 스토펜(mitgebrachten Stoffen), 즉 '회수된 원단'을 이용한 수공예 직물 제조가 비정상적으로 활기를 띠게 됩니다. 일부 여성들은 트뤼머프라우로 일하는 것과 애정 행위를 병행하기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카바레와 나이트클럽의 개장을 촉진하면서 앞서 말한 일상 회복에 오히려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잔해 제거에 참여한 여성 전원에게 낙인이 찍혔습니다. 성병 감염의 위험을 병사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 베로니카 당케쇤(Veronika Dankeschön)과 그들을 동일시한 것입니다. 슬픈 점은 독일 남성들이 귀향한 뒤 그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일부 사회학자들은 그 이유가 갑자기 아내에게 의존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밀려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동서독, 엇갈린 평가
트뤼머프라우엔에 대한 이러한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모순적 시선은 연합군이 점령한 서독 지역에만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소련 통제 하의 동독에서는 이들이 거의 영웅 취급을 받았고, 노동 계급의 상징이자 Nationales Aufbauwerk(국가재건사업)의 핵심 인력으로 선전 속에서 미화되었습니다. 실제로 동독에서는 이들이 대거 재건 사업에 참여한 반면, 서독에서는 참여율이 훨씬 낮았고, 경제 회복이 궤도에 오르자 여성들은 다시 전통적인 역할로 돌아가는 경향을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