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이베리아인의 역사: 대항해시대의 확장부터 예수회 선교까지

해외 확장

포르투갈은 15세기 초 주앙 1세(D. João I) 통치 시기에 유럽 최초로 해외 확장에 나선 나라였다. 바다 항해는 인도로 가는 대체 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전략적 사업이었다. 당시까지 인도와의 무역은 지중해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 해역은 제노바, 베네치아, 아말피 같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많은 유럽인들이 황금처럼 귀하게 여겨지던 향신료를 찾아 인도(오늘날의 아시아)로 향하고자 했다. 한편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각각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으로 봉건 질서의 문제를 정리하는 동안, 포르투갈은 정복 사업에 뛰어들었다. 1415년에는 북아프리카의 세우타(Ceuta)를 점령했고, 1418년에는 마데이라 제도, 1427년에는 아조레스 제도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목표는 아프리카 연안이었으며, 주앙 1세의 후계자이자 '항해왕자'로 불린 엔히크(D. Henrique)가 조직한 원정을 통해 이를 추진했다.

무역 거점과 요새를 세우기 위한 끊임없는 항해는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내 입지를 공고히 했다. 이는 경쟁국들의 활동을 차단하고 금, 노예, 고추, 면화 등 귀중한 자원을 확보하는 것을 보장했다.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항로에는 태풍, 폭풍, 질병, 원주민들과의 전투가 도사리고 있었다. 한 번의 원정에서 선박의 절반을 잃는 일조차 드물지 않았다.

포르투갈 항해사들은 인도양까지 진출해 인도네시아, 중국, 일본에 도달했다. 이로써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에 영토를 둔 삼대륙 제국으로 성장했다.
한편 스페인 역시 서쪽 항로를 통해 인도에 도달하려 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는 서진 항해를 위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도움을 받아들였고, 콜럼버스는 네 차례의 원정을 지휘한 끝에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식민지

1453년 오스만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면서 지중해를 경유하는 인도 항로는 사실상 차단되었다. 이에 포르투갈인들은 값비싼 상품과 향신료를 손에 넣기 위해 바다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15세기 전반기 동안 그들은 아프리카를 돌며 서부 연안을 따라 무역 거점과 항구를 세워 항로를 표시해 나갔다.

이 식민지들에는 별도의 정치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다. 노예상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항구 지역일 뿐이었다. 궁극적 목표가 아시아 도달에 있었던 만큼 왕실은 아프리카 내륙의 개척에 관심이 없었고, 종교 전파에 힘을 쏟을 여유도 없었다.

보석과 귀금속을 확보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은 약탈과 물물교환이었다.

아시아에서는 1498년부터 1499년 사이 포르투갈 항해사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식민지화의 서막을 열었다. 그 직후 스페인은 필리핀을 장악했으며, 1898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7세기 이후에는 영국의 진출과 동인도회사의 세력 확장이 포르투갈의 영향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장인들

16세기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장인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그들이 생산한 제품들은 다른 시장에서 금, 은, 향신료와 교환되며 거래되었다.

유럽 도시의 장인들은 길드(동업조합)를 결성해 임금을 정하고 작업 방식에 대한 규칙을 마련했다.

주요 직업으로는 장갑 제작자, 목수, 대장장이(도구, 무기, 말굽을 제작) 등이 있었다.

이베리아인의 종교

원주민에 대한 숭배와 종교 활동, 교리 교육, 교육과 도덕 전반을 통제한 것은 가톨릭 교회였다. 1534년 예수회 수사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of Loyola)는 유럽에서 가톨릭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부터 보호하고 새로운 땅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단체를 창설했다.

예수회는 짧은 시간 안에 포르투갈 본토와 식민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기관으로 성장했다. 1549년 마누엘 다 노브레가(Manuel da Nóbrega) 신부의 인솔 아래 예수회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브라질에 도착해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정착민들을 교육했다.

17세기와 18세기 사이 예수회는 확장을 거듭하며 학교를 설립하고 감축지(redução)를 건설했다. 미션(mission)이라고도 불리는 이 공동체들은 반유목 생활을 하던 원주민들을 한데 모아 정착시켰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원주민들이 식민지 노예제에 희생되지 않도록 보호했다.

가장 성공적인 감축지 대부분은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국경 인근 남부 지역에 자리 잡았으며, 이곳은 '미션스 7개 마을(Sete Povos das Missões)'로 알려지게 되었다(산토안젤루, 상보르자, 상주앙, 상로렌수, 상루이스 곤자가, 상미겔, 상니콜라우).

1750년 마드리드 조약에 따라 히우그란지두술의 미션스 7개 마을 지역은 포르투갈에 양도되었고, 그 대가로 사크라멘토 식민지는 스페인에 귀속되었다.

원주민들은 가질 수 있는 것만 챙겨 감축지를 떠나야 했다. 가꾸어 온 농경지와 교회, 집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한 원주민들은 예수회의 지원을 받으며 포르투갈 왕실에 저항했고, 이 과정에서 구아라니 전쟁이 발발해 원주민 인구는 몰살당했다. 소수의 생존자들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