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타일레스 핀투(Tales Pinto)
1848년에 발발한 프라이에이라 반란(Praieira Insurrection)은 일반적으로 1822년 브라질 독립 이후 계속되어 온 국내 갈등의 사이클을 종결시키고 브라질 국가에 안정기를 가져다준 반란으로 평가받는다. 흥미롭게도 이 반란은 유럽 대륙 곳곳에서 혁명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민중의 봄(Springtime of the Peoples)'과 같은 해에 벌어졌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세계에 고하는 선언문'과 반란의 10대 요구
페르남부쿠 반군의 요구를 담은 「세계에 고하는 선언문(Manifesto ao Mundo)」을 분석해보면, 유럽과 아메리카 양 대륙에서 주장된 여러 개혁안들과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보르제스 다 폰세카(Borges da Fonseca)가 집필한 이 문서에는 반란의 이른바 '10계명'이 담겨 있었다.
- 첫째, 자유롭고 보편적인 선거권
- 둘째, 언론의 자유
- 셋째, 모든 시민에게 노동권 보장
- 넷째, 소매 상업은 오직 브라질인만 영위 가능
- 다섯째, 정치 세력 간의 조화와 독립
- 여섯째, 중재권(Moderating Power)의 폐지
- 일곱째, 연방제
- 여덟째, 개인의 권리 보장
- 아홉째, 이자 청구의 폐지
- 열째, 징병제의 폐지
선언문의 내용을 통해 페르남부쿠 반란 운동의 명확한 자유주의적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권력분립, 황제의 중재권 폐지, '자유롭고 보편적인' 선거권 보장 등이 그 핵심이었다. 아울러 로버트 오언(Robert Owen),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 프루동(Proudhon) 등이 이끈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로 불리는 정치 사조의 영향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반란의 배경: 엘리트 간 경제·정치 갈등
반란의 기원은 페르남부쿠 엘리트층 사이의 경제적·정치적 분쟁, 특히 전통적인 대플랜테이션 소유주들과 근래에 부를 축적한 신흥 세력 간의 대립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당시 영국이 노예 무역 근절 압박을 강화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노예 구매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려면 북동부 브라질 최대 주였던 페르남부쿠의 국가 기구를 통제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새롭게 부를 축적한 지주들은 올린다(Olinda)와 헤시피(Recife)의 도시 세력—법학 출신 인사, 소상공인 등—과 손잡고 신문 『디아리우 노부(Diário Novo)』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이 신문사가 프라이아 거리(Rua da Praia)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 반란은 '프라이에이라(해변파)'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반군들은 이 신문을 통해 페르남부쿠 최대 지주 가문인 헤구 바호스(Rego Barros) 가문과 카우발칸티(Cavalcanti) 가문이 주도하는 주 정부에 대한 정치적 반대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권력 장악과 실각, 그리고 무장 봉기의 도화선
그러던 중 1845년 안토니우 핀투 시쇼루 다 가마(Antônio Pinto Chichorro da Gama)가 주지사로 임명되면서 반대파는 비로소 주 정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관료 기구를 장악한 반군 세력은 전통적인 사탕수수 엘리트와 연계된 공무원들, 특히 치안 대표(delegate)와 부대표(sub-delegate)들을 해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847년 자유당 정부가 붕괴하면서 반군들은 다시 야당 신세로 전락했고, 이들에 대한 무장 해제 시도가 결국 반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도시 인구 사이에서는 이미 물가, 특히 식품 가격 급등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다. 시민들은 이 상황의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 포르투갈 상인들이 운영하는 상업 시설을 공격하기도 했다. 포르투갈인들이 주 전체 상업을 장악하고 있었던 만큼, 선언문이 소매 상업의 '브라질인 독점'을 요구한 배경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무력 충돌의 전개과정과 진압
무장 충돌은 1848년 11월에 시작되어 1850년 12월까지 이어졌으며, 반군의 주요 지도자로는 페드루 이보(Pedro Ivo), 주앙 리베이루 호마(João Ribeiro Roma), 누네스 마샤두(Nunes Machado), 안토니우 보르제스 다 폰세카(Antônio Borges da Fonseca) 등이 있었다. 이들이 지휘한 부대는 1849년 2월 한때 헤시피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지만, 중앙 정부가 무기와 병력으로 대대적으로 지원한 충성파 군대에는 결국 역부족이었다. 내륙 지방에서의 전투는 1850년 12월까지 계속되었다.
수많은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일부는 해외로 피신했다. 주앙 호마와 누네스 마샤두는 전투 중 목숨을 잃었으며, 체포된 이들은 1851년 사면되었다.
단순한 도시 엘리트의 투쟁을 넘어
하지만 프라이에이라 반란은 도시 엘리트와 중간 계급만의 투쟁은 아니었다. 수공예 노동자와 기타 자유민들도 포르투갈인들이 행사하던 상업 통제가 끝나면 자신들의 생활과 노동 조건이 개선될 것을 기대하며 반란에 참여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계급이 하나의 사회 투쟁에 함께 나설 때 흔히 그러하듯, 사회 위계 하층부에 속한 사람들 또한 결국 패배의 쓴맛을 함께 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