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제정은 브라질 역사에서 도무 페드루 2세(Dom Pedro II)가 군주로서 나라를 다스린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에 브라질은 경제와 정치 전반에서 큰 변화를 겪으며 근대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제2제정(Second Reign)은 1840년 마요리다데 쿠데타(Golpe da Maioridade)로 시작되었다. 이 쿠테타는 페드루 2세의 성년을 앞당겨, 당시 만 14세였던 소년 황제가 조기에 왕좌에 오를 수 있게 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페드루 2세는 1889년까지 브라질을 통치했으며,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국가는 여러 방면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마요리다데 쿠데타와 통치 초기
페드루 2세의 공식적인 즉위는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주도한 1840년의 마요리다데 쿠데타를 통해 이루어졌다. 브라질 법률상 군주는 만 18세에야 친정할 수 있었지만, 이 쿠데타는 일종의 정치적 술책으로 페드루 2세가 14세에 왕좌에 오르는 길을 열어 주었고, 이로써 제2제정이 개막되었다.
1840년부터 1889년까지 이어진 제2제정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 공고화기 (1840~1850): 페드루 2세가 권력을 안정시키고 브라질 내 정치 세력 간의 갈등을 조율하던 시기였다.
- 전성기 (1850~1870): 페드루 2세가 폭넓은 존경을 받는 권위자로 자리 잡았고, 정치 분쟁도 비교적 통제된 상태를 유지했다.
- 쇠퇴기 (1870~1889): 파라과이 전쟁을 계기로 황제의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군주제에 도전하는 운동들이 브라질 곳곳에서 일어났다.
재위 초기 10년간 황제는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고 자유당과 보수당 사이의 정치적 대립을 억제하는 데 힘썼다. 이 과정에서 페드루 2세가 시행한 가장 중요한 제도가 바로 이른바 '역방향 의회주의(parlamentarismo às avessas)'였다.
이 모델에서 황제는 조정권(Moderating Power)으로 부여된 권한에 따라 각료 내각을 직접 임명했다. 그러나 하원이 황제의 의사와 맞지 않으면 의회를 해산하고 새 선거를 실시해 황제의 이익을 옹호하는 의원들로 하원을 재구성했다. 아울러 자유당과 보수당이 번갈아 집권하는 교체 정치도 병행되었다.
브라질 사회·경제의 변화
제2제정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 간의 치열한 정치 다툼으로 특징지어진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노예 노동의 종식을 주장한 폐지론자(abolitionists)와 노예제 유지를 지지한 노예 옹호 세력(slavers) 사이의 대립이었다. 노예제 문제 자체는 제1제정 시절부터 이어져 온 오랜 현안이었다.
제1제정 때부터 브라질 정부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실어 나르던 노예 무역에 대한 조치를 미루어 왔다. 그러나 영국의 압박, 특히 애버딘 법(Bill Aberdeen)에 직면하면서 이런 소극적 태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에우세비우 지 케이로스 법(Eusébio de Queirós Law)이었다.
에우세비우 지 케이로스 법은 1850년부터 브라질에서 노예 무역을 금지했으며, 이를 통해 노예 무역은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 이후 브라질 내 노예 노동력은 점차 희소해지면서 값이 크게 올랐다. 이에 따라 커피 농장주들은 북동부 지역에서 노예를 구입하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폐지론자와 노예 옹호 세력 간의 갈등 속에서 노예제의 점진적·완만한 종식을 이끌어낸 법률들이 제정되었다. 대표적으로 자유 태아법(Lei do Ventre Livre, 1871)과 60세 노예 해방법(Lei dos Sexagenários, 1885)이 있으며, 브라질 노예제의 최종 폐지는 1888년 황금법(Lei Áurea)으로 확정되었다.
경제 분야에서는 커피가 브라질의 핵심 수출품으로 자리 잡았다. 커피 재배는 처음에 리우데자네이루와 상파울루 일대의 파라이바 계곡에서 번창했으며, 이 산업의 성공에 힘입어 재배 지역은 빠르게 확장되어 상파울루 서부 지역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커피 농장주들의 수요와 커피 플랜테이션에 필요한 노동력에 대한 높은 수요는 브라질로 향하는 이민자 증가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특히 노예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1880년대에 이민 붐이 절정에 달했는데, 이민자들은 주로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일본 등에서 건너왔다.
파라과이 전쟁
제2제정의 역사에서 결정적 분기점이 된 사건은 1864년 12월부터 1870년 3월까지 벌어진 파라과이 전쟁이다. 이 전쟁은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와 파라과이 정부 간의 이해 충돌에서 비롯되었으며, 파라과이가 감행한 두 차례의 공격 행위, 즉 상선 '마르케스 드 올린다호' 나포와 마토그로소주 침공으로 촉발되었다.
브라질은 5년간의 전쟁 끝에 승리했지만, 특히 경제 면에서 부정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약 5만 명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입었고, 도무 페드루 2세의 입지도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군부와 공화주의 운동이 브라질 정치 지형에서 힘을 키워 나갔다.
공화국 선포
군주제의 약화는 1870년대 이후 일어난 세 가지 균열로 더욱 확고해졌다. 첫째는 가톨릭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가져온 종교 문제(Questão Religiosa), 둘째는 요구가 묵살되면서 군이 국가와 거리를 두게 된 군부 문제(Questão Militar), 그리고 셋째는 노예 옹호 세력이 국가와 갈라서게 된 노예제 문제(Questão Servil)였다.
공화주의 지지 세력과 더불어 브라질 군주제 종식의 핵심 추동 세력은 육군이었다. 당시 군이 주장했던 것처럼 낮은 처우에 대한 불만과 실증주의(positivism) 사상의 영향이 군이 군주제에 반대하는 음모에 가담하게 된 주요 배경이었다.
1889년 11월 11일, 데오도루 다 폰세카 원수(Marechal Deodoro da Fonseca)는 킨티누 보카이우바를 필두로 한 세력의 설득에 따라 각료 내각에 대한 쿠데타를 주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5일, 그가 직접 쿠데타를 실행했고, 같은 날 주제 두 파트로시니우(José do Patrocínio)가 공화국 선포를 실질적으로 알렸다. 이틀 후 페드루 2세는 유럽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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