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십자군: 중세 유럽의 성전, 1096~1272년의 역사와 영향

성지와 유물은 중세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이미 레콩키스타(Reconquista) 과정에서 성전을 정당화해 온 교회는 예루살렘을 비롯한 성지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을 주도하게 됩니다.

십자군 소집은 항상 교황 칙서에서 출발했습니다. 성직자들은 이를 신성하고 고귀한 목표, 즉 모든 기독교인의 의무로 설파했으며, 여기에는 면죄부(죄 사함)가 수반되었습니다. 이러한 호소에 힘입어 유럽, 특히 프랑스의 왕들, 귀족, 기사, 농민들은 교황의 깃발 아래 종교적 열정과 영광을 위해 몸을 던졌고, 교황은 그 권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정 과정에서 드러난 잔혹 행위는 기독교 내부의 분열을 낳았고, 중동 지역에는 분노를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십자군: 중세 유럽의 성전, 1096~1272년의 역사와 영향

주요 인물

  • 우르바노 2세 (교황)
  • 에우게니오 3세 (교황)
  • 루이 7세 (프랑스 국왕)
  • 콘라트 3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 그레고리오 8세 (교황)
  • 살라딘 (이집트·시리아 술탄)
  • 리처드 1세 '사자심왕' (잉글랜드 국왕)
  • 필리프 2세 오귀스트 (프랑스 국왕)
  • 프리드리히 1세 '붉은수염' 바르바로사 (신성로마제국 황제)
  • 호노리오 3세 (교황)
  • 프리드리히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 인노첸시오 4세 (교황)
  • 루이 9세 '성왕' (프랑스 국왕)

전개 과정

제1차 십자군 (1096~1099)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처음 구상한 제1차 십자군 계획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에 의해 본격화되었으며, 그는 십자군 참가자들에게 전면 면죄부를 약속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길을 나섰으나 도중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상당수의 유태인들이 학살당하는 비극도 벌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네 개의 유럽 군대는 콘스탄티노플 앞에 집결하여 튀르크에게 빼앗긴 영토를 탈환했고, 나아가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프랑크 왕국을 세웠습니다. 원정 도중 많은 귀족들이 소아시아와 시리아에 정착 식민지(에데사 백국 등)를 건설했으며, 서방 무역에 동방의 항구들을 개방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제2차 십자군 (1147~1149)

1144년 튀르크 총독 장기(Zengi)가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자, 교황 에우게니오 3세는 새로운 십자군을 호소했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 황제 콘라트 3세가 이에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가 군인 아닌 민간인으로 구성된 이 순례 원정은 십자군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주었습니다. 두 국왕은 예루살렘의 귀족을 도운 뒤, 에데사 탈환을 시도하지 않고 귀환했습니다. 같은 시기 술탄 살라딘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일하며 십자군의 옛 식민지들을 하나씩 되찾아 갔습니다.

제3차 십자군 (1189~1192)

1187년 예루살렘이 살라딘에게 함락되자,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제3차 십자군을 선포했습니다. 리처드 1세(잉글랜드), 필리프 2세(프랑스), 프리드리히 1세(신성로마제국)는 1188년부터 십자군 참여를 맹세하고, 원정 재원 마련을 위해 '살라딘 십일조'를 부과했습니다. 프리드리히 1세가 원정 도중 사고로 사망하자 남은 두 국왕은 아크레 정복에 나섰습니다. 필리프 2세가 귀국한 후 리처드 1세는 단독으로 전투를 이어갔지만 끝내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1192년 그는 살라딘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기독교 순례자와 무슬림 순례자 모두가 안전하게 성지를 방문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제4차 십자군 (1202~1204)

1054년 동서 교회 분열 이후 고조된 긴장 속에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호출한 제4차 십자군은 상업적 이익을 위한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1204년 콘스탄티노플 약탈이라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제5차 십자군 (1228~1229)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십자군 서약을 이행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너무 늦게 출발한 죄로 파문당한 프리드리히 2세였지만, 그는 원정에 나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예루살렘을 양도받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6차 십자군 (1248~1254)

1244년 살라딘 세력이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자,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새로운 십자군을 호소했고, 1248년부터 루이 9세가 이를 이끌었습니다.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정복했지만, 1250년 이집트의 주인이 된 맘루크에게 국왕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습니다. 다미에타 반환을 조건으로 석방된 루이 9세는 해안 거점 요새화에 힘썼으나, 국왕의 귀환 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라틴계 거점 대부분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제7차 십자군 (1268~1272)

루이 9세는 다시 십자군에 참여하여 튀니스의 통치자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습니다.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하던 무렵, 그는 역병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동생인 앙주의 샤를(Charles of Anjou)은 튀니스와 왕국에 유리한 조건의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한편 맘루크 술탄 칼라운(Qalaun)은 서방이 더 이상 지원할 수 없게 된 레반트 지역의 모든 라틴 국가들을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영향과 결과

  • 영토 확장 외에도 동방에 대한 발견은 지중해 무역의 갱신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실크와 향신료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십자군 참가자들은 원정에서 풍부한 부를 가져왔고, 설화가들 또한 새로운 문화와 상상력을 전해 왔습니다. 당시 동방은 의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서방보다 훨씬 앞선 수준이었습니다.
  • 그러나 십자군은 교회를 찢어놓았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처럼 평화로운 전교를 선호하며 십자군에 반대하는 진영과 찬성하는 진영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 교회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십자군을 동원했고(1207~1208년 알비 십자군 등), 정치적 목적으로도 활용하면서 스스로를 분열시켰습니다. 이는 1054년 동서 교회 대분열의 주요 촉매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