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마르키즈 드 마테농(Marquise de Maintenon) — 루이 14세의 비밀스러운 아내

마르키즈 드 마테농(Marquise de Maintenon) — 루이 14세의 비밀스러운 아내

마르키즈 드 마테농(Françoise d'Aubigné, Marquise de Maintenon, 1635~1719)은 프랑스 니오르에서 태어나 생시르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로, 위그노 역사가 아그리파 도비네(Agrippa d'Aubigné)의 손녀입니다.

파란만장한 유년기와 스카롱의 살롱

그녀는 어린 시절 숙모 밑에서 칼뱅주의 신앙으로 교육받았고, 이후 아버지를 따라 서인도제도에서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프랑스로 돌아온 그녀는 가톨릭 신자였던 대부모의 손에서 자랐고, 울쉬린 수녀회(Ursulines)에 맡겨져 15세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1652년, 이렇듯 기울고 넘어지던 유년기를 지낸 그녀는 코미디 시인 폴 스카롱(Paul Scarron)과 결혼합니다. 중증 마비 환자였던 남편의 집과 살롱을 그녀는 훌륭하게 꾸려나갔고, 그곳에는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세비녜 부인과 라파예트 부인부터 다브레와 비야르소 경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녀의 미모와 재치, 절제된 태도를 칭찬했습니다.

사생아 가정교사에서 왕의 곁으로

1660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녀는 화려한 인맥을 유지하며 '젊고 우아한 미망인'으로서 리슐리외와 다브레의 저택을 드나들었고, 니논 드 랑클로(Ninon de Lenclos)와도 친분을 나눴습니다. 명성이 높아진 그녀는 1669년, 다브레 원수의 사촌이자 왕의 정부였던 몽테스팡 부인(Madame de Montespan)이 낳은 루이 14세의 사생아들을 품위 있게 양육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본래 교육에 대한 소명감이 강했던 그녀는 영적 지도자 고블랭 신부의 격려도 받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을 자주 찾던 루이 14세는 이 예쁘고 총명하며 절제된, 다소 신비로운 미망인에게 점차 관심을 갖게 됩니다. 왕은 그녀의 진중하고 경박하지 않은 대화에서 커다란 위안과 즐거움을 발견했고, 사생아 양육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는 명목으로 그녀에게 마테농 후작 영지를 하사했습니다. 이후 왕이 사생아들을 적법화하면서 마테농 부인에게도 궁정의 문이 열렸고, 1670년 그녀는 새로운 정부 몽테스팡 부인의 제2여관이 되었습니다.

비밀 결혼과 궁정의 변화

왕과의 친밀함이 날로 깊어지는 것을 본 궁정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생시몽 공작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어떤 이들은 마테농 부인을 왕의 심복이라 여겼고, 어떤 이들은 중개인으로, 또 어떤 이들은 왕이 통치 회고록을 집필하도록 돕던 능란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녀의 옷차림과 태도, 행동거지만으로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루이 14세는 그녀를 확실히 사랑하게 되었고, 1683년 7월 마리테레즈 여왕이 서거하자 그해 9월 혹은 1684년 1월경, 파리 대주교 아를레 드 상발롱의 축복 아래 비밀 결혼을 올렸습니다. 45세의 루이 14세는 마침내 방탕했던 생활을 청산하고, 새 아내 곁에서 자녀와 손주들에 둘러싸인 품위 있고 경건하며 가족적인 노년을 준비했습니다. 그 결과 궁정은 방종한 곳에서 독실한 곳으로 변모했습니다. 팔츠 공비는 이를 두고 "왕은 지루해야 비로소 경건해진다고 믿는다"고 신랄하게 적었습니다.

정치적 영향력과 한계

세월이 흐르면서 마테농 부인은 잘 웃지 않고 마음이 건조해 보이는 다소 엄격한 귀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검소하고 절약적이면서도, 사치스러운 오라비 도비네 백작 앞에서만은 무엇이든 들어주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때때로 궁정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했는데, 그녀의 눈에 궁정이란 "서로 놀고, 하품하고, 지루해하며, 시기하고, 서로를 찢어발기는 곳"이었습니다. 화려한 연회는 그녀에게 고역이었습니다.

페넬롱처럼 평화를 지향했던 그녀는 서간문에서 프랑스가 겪는 비참함과 패배 앞에서 느낀 고통을 솔직히 드러냈습니다. 다만 그녀의 정치적 역할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의 개종에 힘쓰기는 했지만, 낭트 칙령 폐지를 직접 추진했다는 정황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영적 지도자인 샤르트르 주교 고데 데 말레의 격려를 받아, 조용히 물러서 있는 자문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종종 왕의 귀를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왕은 그녀가 자수를 놓던 방에서 회의를 열곤 했고, 자주 그녀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대신들은 그녀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일부 대신을 밀어주거나 도왔고, 루부아를 증오했으며, 반대로 독실한 신앙 때문에 콜베르 계열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영향력은 루이 14세의 고해신부였던 라 쉐즈 신부와 르 텔리에 신부보다는 작았을 것입니다. 현세의 정치보다 왕과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더 걱정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왕의 안전을 위해 봉사하게 하소서! 왕과 함께 피난하게 해달라!"라고 그녀는 썼습니다.

생시르 학교 — 인생 최고의 대업

1686년, 그녀는 가난한 귀족 처녀들을 위한 기숙학교인 생시르 학교(Maison de Saint-Cyr)를 설립했습니다. 그녀는 이곳을 직접 운영하며 왕의 관심과 후원까지 이끌어냈고, 이것이 바로 그녀 인생 최고의 사업이 되었습니다. 1715년 루이 14세가 서거한 후, 그녀는 이 생시르에서 은거하며 남은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