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울름 전투: 나폴레옹이 그려낸 '무혈의 걸작' 포위 섬멸전

울름 전투: 나폴레옹이 그려낸  무혈의 걸작  포위 섬멸전

울름 전투는 1805년 10월 15일부터 20일까지(프랑스 공화력 14년 방데미에르 23일~28일), 나폴레옹 1세가 지휘하는 대육군(Grande Armée)이 카를 마크(Karl Mack)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거둔 결정적인 승리다. 이 승리는 주로 황제의 탁월한 기동전 덕분에 가능했다. 마크는 스스로 울름에 갇히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고, 결국 신속히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프랑스군 측 사상자는 놀랄 만큼 적었다.

정치적 배경

1805년 여름, 유럽은 다시 전운에 휩싸였다. 앙기앙 공작의 처형, 아미앵 조약의 파탄, 나폴레옹 1세의 황제 대관식과 이탈리아 국왕 즉위, 그리고 프랑스 주도의 독일·이탈리아 반도 재편은 러시아, 오스트리아, 나폴리 왕국, 그리고 영국으로 구성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특히 영국은 동맹의 비용을 부담하며 부롱뉴에 주둔 중인 프랑스 대육군을 몰아내려 했다. 1805년 8월 말, 제3차 동맹은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프랑스의 동맹국인 바이에른을 침공했다.

전투 전 캠페인

1805년 8월 23일, 나폴레옹은 부롱뉴에 집결시켜 두었던 20만 대군을 "선회"시켜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빈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9월 24일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한 그는 이틀 뒤 라인강을 도강했고, 이윽고 "일곱 개의 급류"라 불린 7개 군단이 독일을 휩쓸었다.

나폴레옹의 목표는 단순했다.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마크가 대육군이 다뉴브강을 따라 전통적인 경로로 울름, 즉 이 지역의 교차로에 도달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뮈라를 보내 마크를 현혹하는 동안, 대육군 본대는 북쪽으로 크게 우회해 울름을 돌파한 뒤 배후에서 기습했다(엘칭겐 전투). 이로써 마크의 퇴로를 차단했으며, 나폴레옹은 술트와 베르나도트를 배치해 어떠한 구원군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쿠투조프가 지휘하는 5만 4천 명의 러시아군이 구원해 올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쿠투조프는 대육군이 아직 부롱뉴에 머물러 있다고 믿고 여유를 부리고 있었던 반면, 프랑스군 주력은 이미 다뉴브강 남안에 도달한 상태였다. 마크 군대의 잔여 병력은 필사적으로 도주했으나 뮈라의 기병대에게 분쇄당해 1만 6천 명이 궤멸하고 대포 50문이 노획되었다.

전투 전 주요 사건

  • 1805년 10월 8일: 베르팅엔 매복전
  • 10월 9일: 균츠부르크 교량 점령
  • 10월 11일: 하슬라흐 전투의 함정 — 프로이센, 중립 선언
  • 10월 14일: 네이, 오버엘칭겐에서 대승(엘칭겐 전투)

양측 병력

마크는 2만 7천 명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탄약 비축량은 충분했지만 식량이 부족했다(1805년은 흉년이었다). 반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8만 명의 병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제2, 제5, 제6군단에 뮈라의 기병 예비대와 근위대가 더해진 규모였다.

전투 경과

미헬스베르크 전투

10월 15일, 황제는 오스트리아군에 항복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즉시 베르트랑 장군에게 공격을 명했으나 격퇴되었고, 이어서 말레 장군(제6군단)이 마침내 울름 서쪽의 미헬스베르크 고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날 울름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마르몽, 란, 네이, 수셰가 도시를 에워쌌고, 저녁에는 루아종 장군이 성문 앞까지 진출했으나 그의 사단은 격퇴되었다.

전투에서 네이 원수가 우익을, 란 원수가 좌익을 담당했다. 미헬스베르크에 진지를 구축한 적군은 초기에 강한 저항을 펼쳤으나, 정면 공격과 배후 위협에 몰려 결국 성 안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네이는 외곽 지역의 적을 맹렬히 몰아붙였고, 베델 대령이 제17경보병연대 선두에 서서 프라우엔베르크를 엄호하는 요새들을 돌파했다. 란도 이 돌파로 열린 진로를 따라 진격했고, 공격은 성공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더 이상 많은 용사들의 피를 흘리기를 원하지 않아 공격 열을 정지시켰고, 잠시 동요했던 오스트리아군은 재정비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베델 대령은 수백 명의 병사와 함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후 프랑스군은 모든 요새와 진입로를 장악했다. 베르넥은 알베크에서 또다시 패배한 뒤 혼란스럽게 프랑코니아로 퇴각했고,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무력으로 탈출할 길이 막힌 오스트리아 장군들은 협상을 통해 포위망을 뚫으려 했다. 리히텐슈타인 공작을 네이 원수에게 사절로 파견해, 키엔마이어의 군대와 합류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요청했다. 네이는 공작의 신분에는 예를 갖추며 그 불운을 존중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러한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즉 오스트리아군은 운명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리히텐슈타인이 이 소식을 울름에 전하자, 장군들은 회의를 열어 최후의 결심을 내렸다.

"울름 수비군은 네이 원수께서 받아들여 주기를 기대했던 정당한 조건이 거절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전쟁의 운명이 기울 때까지 결연히 버틸 것을 결의한다."

울름의 항복

다음 날, 나폴레옹은 참모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시에 대한 총공격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돌격은 인명 손실이 클 것이 분명했고, 울름은 어차피 조만간 함락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마크는 여전히 러시아군의 조속한 도착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량이 고갈되자, 그는 러시아군이 구원해 오지 않으면 10월 25일에 요새를 항복시키기로 결심했다. 결국 짧은 포격 끝에 그는 굴복했고, 나폴레옹과 항복 조건을 협상했다.

10월 20일,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황제 앞에서 5시간 동안 행진했다. 포로가 된 보병들은 소총을 내려놓았고 기병들은 말을 남겼다. 그들은 모두 프랑스로 호송될 예정이었다. 반면 오스트리아 장교들은 나폴레옹 1세로부터 무기를 보유한 채 귀향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단, 다시는 프랑스와 싸우지 않겠다는 조건이 붙었다.

전투 결과

2만 5천 명의 오스트리아군이 포로가 되었으며, 그중 장군이 18명이었다. 대포 60문도 노획되었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불과 전사 500명, 부상 1,000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전역의 향방을 좌우할 결정적 승리였음에도 말이다. 불과 2주도 안 되는 기간에 대육군은 대포 노획은 물론, 오스트리아군 6만 명과 장군 30명을 전력에서 제거했다.

이것야말로 전략적 승리의 정점이다. 정작 전투 자체는 벌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폴레옹은 마렝고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은 함정을 훨씬 더 철저한 준비와 성공으로 설치했으며, 모든 것은 적을 기만하기 위해 짜여진 완벽한 계획이었다.

황제의 포고문

"대육군의 병사들이여, 나는 너희들에게 큰 전투를 예고했다. 그러나 적의 어리석은 작전 덕분에 나는 아무런 위험도 무릅쓰지 않고 같은 성과를 거두었다... 15일 만에 우리는 하나의 전역을 수행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805년 10월 21일자 「대육군 회보」

실제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 중 가장 중요한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빈 입성의 길을 열었고, 빈은 한 달 뒤 함락되었다.

영향과 여파

마크를 격파했지만, 나폴레옹은 아직 동맹 자체를 꺾지는 못했다. 러시아군은 갈리치아에서 막 출발한 참이었고, 10월 21일에는 영국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황제 나폴레옹 1세는 "러시아군에게 절반의 길을 덜어주기 위해" 빈으로 진군했다. 빈은 쿠투조프가 이끄는 러시아군과 여러 차례 교전 끝에 11월 14일 함락되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을 완전히 종결시키기로 결심하고 추격에 나섰고, 결정적 전투는 빈 북쪽 80km 지점의 아우스터리츠에서 벌어지게 된다.

한편 마크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2년간 감옥에 갇힌 뒤 정계에서 실각하고 말았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의 바이에른 전역은 오늘날에도 세계 최고의 군사학교에서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전투 개요

  • 일자: 공화력 14년 방데미에르 23일~28일 (1805년 10월 15일~20일)
  • 장소: 울름 (바덴뷔르템베르크/바이에른)
  • 결과: 프랑스의 결정적 승리 — 바이에른의 오스트리아군 궤멸
  • 교전국: 프랑스 제국 vs 오스트리아 제국
  • 지휘관: 미헬스베르크 — 미셸 네이, 장 란 / 울름 — 나폴레옹 ↔ 리히텐슈타인 공작(미헬스베르크), 칼 마크 폰 라이버리히(울름)
  • 병력: 8만 명 vs 4만 명
  • 피해: 프랑스군 전사 500명 / 오스트리아군 전사 4,000명, 포로 25,000명, 대포 60문 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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