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베일렌 전투: 나폴레옹 군대의 '무적 신화'를 깬 스페인의 결정적 승리

베일렌 전투: 나폴레옹 군대의  무적 신화 를 깬 스페인의 결정적 승리

베일렌 전투(Battle of Bailén)는 1808년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프랑스 침략군에 맞서 일어난 봉기의 결정체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는 나폴레옹 군대가 겪은 최초의 대규모 패배로 기록됩니다.

전쟁의 배경

1808년 5월, 나폴레옹은 바욘에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에게도 퇴위를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7월 7일, 자신의 동생인 조제프를 스페인 왕 조제프 1세로 옹립했습니다.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무능함과 대비되는 것은 국민들의 용기와 민족주의, 때로는 광신적인 저항 정신이었습니다.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도스 데 마요 봉기'와 이튿날 무라트가 감행한 잔혹한 진압은 마드리드의 거리를 피로 물들이며, 스페인 독립전쟁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스페인 대부분의 지역이 봉기 상태에 빠진 가운데, 뒤퐁 드 라탕(Dupont de l'Étang) 장군은 로질리(Rosily) 제독 함대의 잔여 병력에 대한 포위를 해소하고 안달루시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카디스 방면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뒤퐁이 지휘하는 제2 지롱드 관측군단은 바르부(Barbou), 베델(Vedel), 프레르(Frère) 세 개 사단과 프레지아(Fresia)가 지휘하는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남진과 안달루시아의 분노

5월 24일, 뒤퐁의 군대는 톨레도를 출발했습니다. 병력은 약 1만 2천 명으로, 바르부 사단 6천 명, 프레지아 기병사단 2천 명, 근위대 해병대 대대 400명, 그리고 포병과 공병 병력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스페인에 고용되어 있던 스위스 연대 소속 약 3천 명이 강제 징집된 형태로 추가되었습니다.

6월 7일, 프랑스군은 코르도바에서 약 10km 떨어진 알콜레아 다리에서 돈 페드로 아구스틴 에차바리가 지휘하는 의용병 중심의 스페인 분견대를 격파했습니다. 같은 날 프랑스군은 코르도바를 점령하고 4일 동안 도시를 약탈했으며, 이 만행은 안달루시아 전역에 복수의 불씨를 지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6월 14일에는 로질리 제독이 스페인군에 항복하면서 뒤퐁 임무의 상당 부분이 무의미해졌습니다. 뒤퐁은 6월 16일 코르도바를 떠나 후퇴하여 6월 18일 안두하르에 진영을 구축했습니다. 적대적인 봉기 지역에 고립된 뒤퐁은 마드리드에 여러 차례 구원 요청을 보냈습니다. 6월 19일, 베델 장군은 보병 5천 명, 기병 450명, 대포 10문을 이끌고 톨레도를 출발했습니다. 6월 26일에는 시에라 모레나 산맥의 데스페냐페로스 협곡에서 게릴라 2천 명을 격파하고, 한 개 대대를 협곡 방어에 남겨둔 채 나머지 병력으로 뒤퐁의 군대와 합류했습니다.

한편 사바리의 명령에 따라 고베르(Gobert) 사단이 몽세 원수를 지원하기 위해 발렌시아로 떠난 프레르 사단을 대체하게 되었고, 7월 2일 마드리드를 출발해 뒤퐁을 증원하는 동시에 안두하르와 마드리드 간의 통신선 확보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사단 병력의 상당수는 수도와 지방을 잇는 주요 도로인 카미노 레알을 따라 분산 배치되었습니다. 결국 뒤퐁의 병력은 극도로 분산되었습니다. 고베르는 라 카롤리나에, 베델은 베일렌에, 뒤퐁 본인은 가장 큰 병력과 함께 안두하르에 위치했고, 그 외에도 전략 요충지를 확보하는 분견대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전투의 경과

스페인군 총사령관 카스타뇨스(Castaños) 장군은 3만 6백 명 규모의 군대를 편성했습니다. 이 군대는 네 개 사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사단은 테오도르 드 레딩(Theodore de Reding) 장군, 제2사단은 발롱 출신의 쿠피니(Coupigny) 후작, 제3사단은 아일랜드계 펠릭스 존스(Felix Jones) 장군, 제4사단은 유일한 순수 스페인인 지휘관인 마누엘 라 페냐(Manuel la Peña) 장군이 맡았습니다. 여기에 크루스 무르헤온(Cruz Mourgeon) 대령이 지휘하는 산악사단과 발데카냐스 백작의 의용부대가 추가되었습니다.

7월 16일, 과달키비르 강변의 멩히바르에서 베델 사단 일부와 증원을 위해 온 고베르의 부대가 레딩 사단과 격돌하는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베르 장군은 공격 중 전사했고, 프랑스군은 베일렌과 라 카롤리나로 후퇴했습니다. 한편 뒤퐁의 소집에 응해 안두하르로 향했던 베델은 다시 베일렌으로 돌려져 레딩 장군을 추격했으나 적을 찾지 못했고, 결국 라 카롤리나 방면으로 계속 수색을 이어갔습니다.

베일렌의 결전

7월 18일 저녁, 뒤퐁은 인근에 주둔한 카스타뇨스 군대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어둠을 틈타 안두하르를 탈출했습니다. 19일 새벽 3시경, 프랑스군 선봉대는 베일렌에서 5km 떨어진 럼블라르 다리에서 스페인 분견대와 접촉했습니다. 뒤퐁이 종대 선두에 합류한 오전 4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오전 4시부터 정오까지 뒤퐁은 베일렌 마을 서쪽 출구에 진형을 갖춘 레딩과 쿠피니의 스페인군을 상대로 다섯 차례의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정오 무렵 프랑스군 측에서 전투 가능한 병력은 2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많은 병사가 극심한 더위와 갈증에 지쳐 전장을 이탈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직면한 뒤퐁은 전투 중지를 요청했고, 레딩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날 오전 두 명의 '부재자'가 전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페인군 총사령관 카스타뇨스는 라 페냐와 그의 사단을 오전 8시에 레딩과 쿠피니를 지원하도록 보낸 것 외에는 움직이지 않았고, 이 증원 부대는 휴전 이후에야 럼블라르에 도착했습니다. 반면 베델은 라 카롤리나에서 들린 전투 소식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오전 7시가 되어서야 출발했고, 병사들은 라 카롤리나에서 베일렌까지 23km를 걷는데 무려 10시간을 소모해 오후 5시에야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베델은 프랑스군의 패배를 믿지 않고 베일렌 북동쪽 마드리드 방면 도로를 감시하던 스페인군에게 돌진했지만, 뒤퐁 드 라탕이 자신마저 휴전 협상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결국 무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항복과 안두하르 조약

다음 날, 휴전에 이은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스페인 측에서는 카스타뇨스, 틸리, 에스칼란테가, 프랑스 측에서는 부상과 질병으로 참석하지 못한 뒤퐁을 대신해 그가 지명한 샤베르(Chabert), 마레스코(Marescot), 비유트레(Villoutreys)가 참여했습니다. 협상의 결과는 프랑스군의 순수한 항복이었습니다.

7월 22일, 제2 관측군단은 항복하고 안두하르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이 조약은 결국 준수되지 않았습니다. 뒤퐁과 그의 장군들은 배로 이송되어 마르세유와 툴롱으로 향했습니다. 약 1만 6천 명에 달하는 프랑스군 나머지 병력은 우선 카디스로 이송되어 포선에 수감되었습니다. 이 포선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살아남은 배들을 개조한 것으로, 상부 구조물을 모두 제거한 상태였습니다. 1809년 2월부터 일부 포로는 발레아레스 제도의 카브레라 섬으로, 다른 일부는 카나리아 제도로 이송되었습니다. 1810년에는 장교들이 영국으로 옮겨져 계속 억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소수의 병사만이 1814년, 마침내 석방될 때까지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의 역사적 의의

베일렌에서의 스페인 승리는 프랑스군이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럽 전역에 입증했습니다. 이 승리는 프랑스에 점령당했거나 위협받거나 강제로 동맹을 맺었던 여러 나라들이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다시 일으킬 용기를 얻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을 향한 첫 번째 균열로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