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파리 코뮌의 최후: 피의 일주일과 혹독한 억압

피의 일주일: 파리 코뮌의 몰락

파리 코뮌은 1871년 5월 21일 베르사유군이 파리 시내로 진입하면서 시작된 '피의 일주일(Semaine sanglante)' 기간 동안 마침내 패배했습니다. 이 유혹의 나날은 5월 28일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로 막을 내렸습니다.

당시 목격자들은 베르사유군에 의한 수많은 즉결 처형을 입을 모아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피의 일주일 동안 약 1만 명에서 2만 5천 명에 이르는 즉결 처형이 자행되었고, 코뮈나르(코뮌 지지자) 노동자들에 대한 강간과 살인도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그 보복으로 코뮈나르들 역시 파리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습니다. 특히 튈르리 궁전, 사법궁(팔레 드 쥬스티스), 레지옹 도뇌르 궁전, 시청(호텔 드 빌) 등 여러 역사적 공공 건물들이 고의로 불태워졌습니다. 이 화재로 파리 호적 기록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습니다. 다만 프랑스 정규군과 프로이센군의 끊임없는 포격 역시 수많은 화재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코뮌의 인질 사건

같은 시기, 코뮌 측에서도 인질을 확보했습니다. 파리 대주교 조르주 다르보이(Mgr Georges Darboy)는 1871년 4월 4일, 코뮌의 '인질령'에 따라 무고한 사람 네 명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마자스 감옥에 유폐되어 있다가, 5월 24일 베르사유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라 로케트 감옥에서 처형되었으며, 처형대 앞에서 집행자들을 축복했다고 전해집니다.

가혹한 탄압과 그 후유증

코뮈나르들에 대한 탄압은 극히 가혹했습니다. 거의 1만 건에 달하는 사형 선고, 뉴칼레도니아로 향하는 4천 명의 유배 등이 이어졌으며, 사면법이 시행되기까지는 1880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의 성심 대성당(Basilique du Sacré-Cœur)은 1873년부터 교회와 국가가 함께 착공한 건물로, 그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코뮈나르들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에 남은 파리 코뮌의 유산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정권인 파리 코뮌은 이후 좌파, 극좌, 아나키스트들에게 각기 다른 관점에서 이상적인 모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또한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평의회), 스페인 혁명과 코무니다드(공동체) 운동 등 수많은 혁명 운동에 영감을 불어넣었으며, 이들은 코뮌이 남긴 교훈을 바탕으로 새로운 혁명을 추진해 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