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프로이센 군대에 의한 첫 포위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파리는 또 한 번의 포위전에 직면했다. 이번 적은 외세가 아니라 티에르 정부가 이끄는 베르사유군이었다. 코뮌 선포 직후 시작된 이 '두 번째 파리 포위전'의 전개 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본다.
베르사유군의 선제 공격
먼저 움직인 것은 베르사유군이었다. 4월 2일, 그들은 코뮌 측이 방비를 소홀히 한 채 내버려두었던 몽발리앵(Mont-Valérien)을 손에 넣었다. 이 고지는 파리 서쪽 교외 전역을 내려다보는 요충지였기에 베르사유군에 결정적인 이점을 안겨 주었다.
그보다 앞서 3월 30일에는 갈리페(de Galliffet) 장군이 쿠르브부아 로터리에서 코뮌 부대를 몰아낸 바 있었고, 4월 2일 베르사유군은 쿠르브부아와 퓌토를 점령했다. 코뮌군은 뇌이 방면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로 끝난 베르사유 역습
4월 3일, 코뮌은 플루렝, 외드, 뒤발의 지휘 아래 베르사유 방면으로 대반격을 감행했으나 뤼이유와 샤티용에서 좌절하며 실패로 돌아갔다. 구스타브 플루렝은 뤼이유에서 헌병 장교에게 암살당했고, 에밀 뒤발은 재판조차 없이 4일 참모진과 함께 비누아 장군의 명령으로 총살되었다. 같은 날, 귀스타브 클뤼제레가 코뮌의 전쟁 대표로 임명되었다.
베르사유 측의 이러한 만행에 대한 응답으로, 코뮌은 4월 5일 인질령을 의결했다. 코뮌 측 처형자 한 명당 인질 세 명을 총살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나 이 조치가 실제로 집행된 것은 5월 말의 '피의 일주일' 때였다.
산발적 전투와 집중 포격의 3주
이후 약 3주간 지상 전투는 산발적으로 이어졌지만, 포격은 극도로 집중적이었다. 특히 뇌이는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며, 4월 25일에는 주민 대피를 위한 일시 휴전이 합의되기도 했다. 이 소강기는 오히려 베르사유군이 전력을 증강할 시간을 벌어 주는 결과를 낳았다.
남서부 방어선의 무너짐
4월 26일 저녁, 베르사유군은 물리노 마을을 점령했고, 29일에는 이시 요새를 함락했다. 그러나 이 요새는 다음 날 로셀의 지휘 아래 코뮌군이 재탈환했다.
5월 1일, 해임된 클뤼제레를 대신해 루이 로셀이 새 전쟁 대표로 임명되었다. 5월 4일, 베르사유군은 내부자의 배신(이 배신은 훗날 아르쾨유의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체포되는 빌미가 되었다)에 힘입어 물랭사케 방어진지를 함락하고 그곳에서 잔혹행위를 자행했다. 이어 5일에는 클라마르 마을을 점령했다.
8일에는 파리 성곽 방어선이 그르넬에서 파시에 이르는 구간에서 격렬한 포격을 받았고, 9일에는 이시 요새가 다시 베르사유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같은 날인 5월 8일, 티에르 정부는 파리 시민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5월 10일, 사임한 로셀의 뒤를 이어 샤를 들레클뤼즈가 전쟁 대표로 임명되었다. 13일에는 베르사유군이 반브 요새를 점령했으나, 코뮌 성벽 포병의 강력한 화력 앞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17일에는 라프 가도의 탄약 공장이 파괴 공작으로 추정되는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
생클루 문의 돌파, 그리고 피의 일주일
운명의 날은 5월 20일이었다. 24번 방어벽에 위치한 교량·도로공사국 기사 뒤카텔의 배신 행위로 인해, 베르사유군은 생클루 문을 통해 파리 시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파리 코뮌의 최후를 장식할 '피의 일주일'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