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무너지지 않는 비아프라
전쟁 발발로부터 1년이 지났지만, 나이지리아 연방군은 여전히 우세한 군사적 성과를 결정적인 승리로 전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 절체절명의 추격 상황에서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하며 버텨낸 비아프라 측의 저항
- 나이지리아군의 열악한 지휘 체계와 수송 능력의 한계
-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비아프라에 물자를 공급해 준 외국 기부자들의 호의
- 주민들의 적대감 속에서 점령 지역을 통치하며 겪는 나이지리아군의 어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아프라의 존재는 극도로 불안정했으며, 완전히 외부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교착된 평화 협상
1969년 8월 28일, 아프리카 각국 장관들이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모여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비아프라와 나이지리아 양측 모두 일보 후퇴도 없는 확고한 입장에 고집하고 있었다. 갈등의 종결은 여전히 멀어 보였고, 수많은 구호 단체들의 헌신과 연대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수천 명의 아이들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고 있었다.
흔들리는 고원 정권
1969년 말, 야쿠부 고원(Yakubu Gowon) 정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존 지역을 여러 주(state)로 세분화한 조치는 정치적 갈등의 골을 다소 완화시켰지만, 전쟁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군 입대가 실업자 일부를 흡수하기는 했고 1964~1965년의 격랑 같은 혼란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교착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거나 전쟁이 끝난 뒤 재배치 전망 없이 대규모 병력이 제대한다면 언제든 유사한 혼란이 재현될 수 있는 상황임은 분명했다.
비아프라 내부의 연대와 이보족의 운명
비아프라에서는 공통된 고통과 불행 덕분에 국민 사이의 연대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많은 비아프라 시민들이 전쟁에 지쳐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는 듯했다.
나이지리아가 이보족(Igbo)에게 북부 지역의 직장으로 돌아오라고 권유하면서 동시에 유전 지역으로부터 그들을 차단하는 것은 완전히 비현실적인 정책이었다. 북부에서 이보족의 역할은 이미 끝났고, 직업과 유전 채굴권에서 나오는 수입 없이는 중앙동부주(Central East State)가 그들을 부양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비아프라에서는 포위 상태와 기근, 폭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거의 변하지 않은 듯 보였다.
붕괴의 시작
비아프라의 몰락은 1969년 12월 18일 시작되었다. 비아프라군은 나이지리아의 새로운 공세에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고, 남부 전선 전체가 붕괴했다. 임시 수도였던 오웨리(Owerri)마저 함락되었다.
1970년 1월 12일, 항공 교두가 두절되었고 비아프라 부대 대부분이 무기를 내려놓았다. 나이지리아 측은 투항하는 병사들에게 사면과 생명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했다. 오주쿠(Ojukwu) 장군은 "명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국외로 떠났으며, 국정을 소수 민족인 에킥(Ekik) 부족 출신의 필립 에피옹(Philip Effiong) 장군에게 맡겼다.
"하나님의 도우소서"
1970년 1월 13일, 에피옹은 라디오 담화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국민의 대표단이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 대표들과 어디서든 만나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소서!"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비아프라라는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