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첫 번째 위기(1948~1953)
이란-소련 위기
이란-소련 위기는 훗날 냉전이라 불리게 될 대립의 첫 번째 격돌로, 쟁점은 이란이었다. 1941년 여름, 소련과 영국은 러시아 전선으로 무기와 물자를 수송할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이란을 각각 절반씩 점령하고, 추축국에 지나치게 우호적이었던 샤(국왕) 레자 팔레비를 축출하기로 합의했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모하메드 레자는 이들 강대국과 조약을 체결해 1946년 3월 2일까지 병력을 철수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소련은 곧바로 이란 북부의 두 독립 운동을 지원해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남쪽에 방어 완충지대를 구축하려 했다. 이에 따른 이란 정부와의 협상과 서방의 압박 끝에 결국 붉은 군대는 철수했다.
제1차 베를린 위기(1948~1949)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 연합국 3개국 지도자인 처칠(이후 노동당의 애틀리로 교체), 스탈린, 트루먼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 점령지역으로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마찬가지로 옛 제국의 수도 베를린도 4개 점령 구역으로 나뉘었다. 소련 점령지역 내륙에 위치한 베를린은 항공·고속도로·철도 통로로 서방 점령지역과 연결되어 있었다.
1948년 2월 프라하 쿠데타 이후 서방 진영은 자신들의 삼개 점령지역을 단기간 내에 주권을 가진 서독 국가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런던 회의, 1948년 4~6월). 그 첫 단계가 바로 6월 20일 서방 3개 지역의 공용 화폐가 된 도이칠란트마르크(Deutsche Mark) 발행이었다. 스탈린은 이러한 사실상의 독일 분단에 항의했고, 1948년 6월 23일 베를린의 지리적 고립을 이용해 서방 점령 구역으로 향하는 모든 육상·수상 교통을 차단했다. 200만 명이 넘는 주민과 3만 명의 연합군 병사가 철의 장막 뒤 인질이 되었다.
처음에 연합군은 클레이 장군의 제안대로 봉쇄를 무력으로 돌파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선제 공격한 것으로 비칠 무장 분쟁을 일으킬 위험은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대응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는데, 그것은 봉쇄 정책의 실패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베를린이 질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영국과 미국은 마침내 공수 보급 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즉 식량, 연료, 석탄 등을 비행기로 수송하는 것이었다. 봉쇄가 지속된 11개월 동안 서베를린의 템펠호프, 가토브, 테겔 공항에는 평균 30초마다 한 대꼴로 수송기가 착륙했다. 총 27만 5천 회의 비행으로 250만 톤의 화물(석탄이 3분의 2 차지)이 운송되었다. 서베를린 주민 중 5% 미만만이 소련 당국으로부터 물자를 공급받기를 선택한 것으로 추산된다. 1949년 5월 12일, 실패를 자각한 스탈린은 봉쇄 해제를 결정했다.
위기 기간 동안 미국은 서유럽 침공 가능성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리기 위해 B-29 전략 폭격기 3개 비행대대를 영국에 배치했다. 그러나 원자폭탄 독점권을 갖고 있었음에도 원자력 최후통첩을 통해 베를린 봉쇄를 종식시키고, 소련이 "인구의 모든 민주주의 세력을 폭넓게 대표하는 임시 정부를 구성하여, 가능한 한 빨리 자유선거를 통해 국민의 의사에 부응하는 정부를 수립하겠다고 약속하는" 모든 국가에서도 철수하도록 강요하는 방안은 고려하지 않았다(얄타 협정 참조). 실제로 서유럽은 재건의 한가운데 있었고 동구권의 재래식 군사력은 서방보다 훨씬 우세했다. 이처럼 미국은 스탈린이 얄타 협정에서 바라왔던 유럽 분단을 사실상 승인하게 되었다.
1949년 5월 23일, 기본법(Grundgesetz)의 공포와 함께 독일의 분단이 공식화되었고, 이는 독일연방공화국(FRG, Bundesrepublik Deutschland)의 출생 증명서가 되었다. 10월 12일에는 소련 점령지역 역시 주권 국가인 독일민주공화국(GDR,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이 되었다. 두 국가는 법적으로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제 독일은 냉전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이 위기는 소련의 세계적 위신을 크게 훼손했다. 한편으로는 강압 정책에 맞서 굶주림 속에서도 버텨낸 베를린 시민들의 모습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적 굴욕 때문이었다. 동시에 미국의 위상은 서독 국민들 눈에 높아졌으며, 미국의 지위는 점령자에서 보호자로 바뀌었다.
한국전쟁(1950~1953)
한국전쟁의 배경에는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중화민국의 장제스를 누르고 승리한 사건이 있다. 미국은 아시아의 또 다른 나라가 공산화되는 것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막으려 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양분되었다. 남쪽에는 이승만이 이끄는 친미 성향의 대한민국이, 북쪽에는 김일성이 이끄는 친소 성향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1948년과 1949년에 소련군과 미군은 38선을 경계로 한 각자의 점령 지역에서 철수했다.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기자들에게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이 알류샨 열도, 류큐 열도, 일본, 필리핀을 포함한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한국은 명백히 그 방어선에 포함되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스탈린의 승인 아래, 어쩌면 미국의 선언에 고무되어 38선을 넘어 남침했다.
6월 27일, 유엔은 북한의 침공을 규탄하고 대한민국을 지원하기로 결의했다. 1950년 2월부터 소련은 대만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임이사국 자리를 가져야 한다며 안보리 회의를 보이콧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태평양 전쟁의 승자인 맥아더 장군이 주로 미국 병력으로 구성된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9월 말, 맥아더는 중국 국경에 도달했다.
10월, 85만 명의 '중국인민지원군', 사실상 정규군의 개입에 직면하자 그는 38선까지 후퇴해야 했고, 전선은 1951년 3월에야 마침내 안정되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터무니없는 계획을 제안했다. 만주 폭격, 중국 연안의 해상 봉쇄, 장제스 군대의 중국 남부 상륙, 필요하다면 원자무기 사용까지였다. 소련의 개입을 초래할 것이라 확신했던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고 리지웨이 장군으로 교체했다.
1953년 7월 27일, 스탈린 사후 2년간의 회담 끝에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평화조약은 체결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