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테트 공세 이후 미국의 반응: 증원 논쟁과 존슨 대통령의 선택

테트 공세 이후 미국의 반응: 증원 논쟁과 존슨 대통령의 선택

워싱턴을 뒤흔든 위기감

테트 공세가 남긴 충격은 전선의 병사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사이공에서 돌아온 미국 합동참모본부 의장 얼 휠러 대장은, 자신이 머물던 숙소마저 적의 포격에 시달렸던 그 도시에서 무거운 심경으로 귀국했다. 한편 베트남 주둔 미군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대장은 테트 공세의 결과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유지하면서도, 적이 언제든 추가 작전을 감행할 능력을 갖췄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휠러와 참모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베트남 문제만이 아니었다. 북한이 미국 정보수집선 푸에블로호를 나포했고, 베를린과 중동 정세는 언제라도 다시 폭발할 듯 긴장이 감돌았다. 미 육군의 전략예비부대는 단 하나의 사단 규모로 줄어들었으며, 베트남 전쟁은 세계 각지에 주둔한 미군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20만 6천 명의 증원 요구

전략예비대를 보충하고 남베트남에서 앞으로 벌어질 적의 행동에 대비하기 위해, 휠러는 웨스트모어랜드에게 대규모 미군 증파를 요청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상황을 활용하려던 웨스트모어랜드는 이것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만약 대통령이 허락한다면, 이 병력으로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상륙작전을 펼쳐 비무장지대 안의 북베트남군을 포위 섬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예비병력 요청이 북베트남에게 미국이 승리 외의 어떤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존슨 대통령의 검토와 언론의 반발

그러나 린든 존슨 대통령은 20만 6천 명이라는 추가 병력 요구—절반은 남베트남용, 나머지 절반은 전략예비대용—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이 증원으로 달성할 수 있는 성과에 대한 심층 분석을 두 차례에 걸쳐 지시했다. 첫 번째는 새로 부임한 국방장관 클라크 M. 클리포드가 이끄는 위원회에, 두 번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저명한 지휘관들을 포함한 예비역 장교 그룹에 맡겨졌다. 그러나 아마도 신문과 TV에서 접한 보도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은 탓일 것이다, 두 그룹 모두 증원 반대 입장을 밝혔다.

대통령은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공식 발표에 앞서 뉴욕타임스가 행정부가 '베트남'에 20만 6천 명의 추가 병력을 파병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폭로해 버렸다. 언론과 방송은 전쟁 관련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 비판적으로 반응했다. 며칠 후 치러진 뉴햄프셔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대통령의 성적이 상대적으로 부진하자, 언론은 이를 유권자들의 반전 시위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가 보여주듯, 이 표결은 실제로는 테트 공세 이후 존슨이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못한 데 대한 항의에 가까웠다.

현장의 실상: 되레 강해진 남베트남

남베트남에서 이후 몇 달간의 전개는, 웨스트모어랜드가 주장했던 대로 적이 테트 공세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공산군은 5월과 10월에 로켓포와 박격포로 두 차례 추격 공세를 시도했으나, 두 작전 모두 태어나기도 전에 끝난 실패작에 불과했다. 언론이 성급하게 매장했다고 평가받던 평정화(패시피케이션) 프로그램은 오히려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공세 기간 정부의 통제가 일시적으로 무너졌던 지역에서 통치력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심지어 상당히 강화되기까지 했다.

낙담하기는커녕 남베트남군(ARVN)은 능력과 사기가 한층 높아진 모습을 보였고, 신병은 넘쳐났다. 미군은 정규군과 민병대에 새롭고 더 우수한 무기와 장비를 지급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민간인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처음으로 사람들은 사이공 정부에 진심 어린 지지를 보내는 듯했다. 정부는 곧 수천 명의 주민에게 무기를 지급해 전국 단위의 자위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인민을 두려워하는 정부가 과연 그 무기를, 언젠가 자신을 겨눌지도 모르는 무기를 손에 쥐여주겠는가?

웨스트모어랜드의 물러남과 에이브럼스의 등장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에서 4년 반을 보낸 웨스트모어랜드를 미 육군 참모총장으로 승진시키고, 사이공에서 그의 부임자였던 크레이튼 W. 에이브럼스 대장을 새로운 현지 미군사령관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흥미롭게도 이 결정은 테트 공세 이전인 1월 중순에 이미 내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발표가 늦어지면서, 웨스트모어랜드를 비판하던 이들은 대통령이 테트 공세 기간 장군에게 실망해 그를 '갈림길로 승진시켰다'고 계속 주장할 명분을 얻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