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산 공방전과 '디엔비엔푸 증후군'
베트남전 당시 케산(Khe Sanh)에서 종군 기자들은 이른바 '디엔비엔푸 증후군'이라는 틀을 만들어냈다.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에서 참패했듯, 미 해병대와 남베트남 레인저 부대 역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끊임없이 예측한 것이다. 나아가 기자들은 미군 지휘부가 그곳에 머물며 싸우기로 한 결정 자체를 문제 삼기까지 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케산에 주둔한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6,000명으로, 웨스트모어랜드(Westmoreland) 장군이 운용 가능한 전체 전력의 겨우 60분의 1에 불과했다. 바로 이 소수 병력이 북베트남군 2만 명을 묶어두며 버티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자들은 적이 상당한 미군 병력을 꼼짝 못 하게 묶어두었다고 주장했고, 정작 그 2만 명의 북베트남군이 도시 지역에서 공산 진영에 훨씬 더 크게 기여할 수 있었음이라는 사실은 외면했다.
'심리적 승리'론과 과장된 보도
기자들은 공산 세력의 패배를 알리는 공식 발표에도 반발했다. 사실이라 하더라도—그들은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적의 손실에 관한 공식 수치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어쨌든 공산 세력은 '심리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논리였다.
남베트남어를 구사할 줄 모르던 일부 기자들은 대신 현지 주민들을 '정신분석'하며, 자신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에 환멸을 느낀다는 소위 실망론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또 다른 기자들은 테트 공세가 국내 치안 숙달(패시피케이션) 프로그램에 미친 영향을 제대로 평가할 역량이 없으면서도, 치안 숙달 사업이 '산산조각 났다', '돌이킬 수 없다', 심지어—과장이란 말로도 부족한—'완전히 죽었다'고 단언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여론은 오히려 존슨 대통령에게 결집
그러나 여론조사가 드러내듯, 이러한 보도들은 미국 대중을 전쟁에 반대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은 존슨 대통령에게 결집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등을 돌린 것은 존슨이 공산 세력에 대한 강력한 보복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한 이후였다.
워싱턴을 흔든 미디어의 힘
미디어의 행보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무대는 하급 공무원들과 워싱턴의 대통령 참모진이었다. 의회의 '매파(hawk)'들은 입을 다물었고, '비둘기파(dove)'는 갈수록 요란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많은 공무원들이 한 대통령 특별 고문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는 사이공에서 도착하는 공식 전문을 읽을 때면, 전날 저녁 텔레비전에서 접한 내용과 비교해 그것이 거의 '환각적'이라고 느꼈다고 회고했다. 현장의 실제 보고와 화면 속 전쟁 사이의 극단적 괴리, 그것이야말로 당시 워싱턴을 집어삼킨 혼란의 단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