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겨울, 베를린을 노린 크루쇼프의 공세
1958년 11월, 니키타 크루쇼프는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미국, 프랑스, 영국 3국에 보낸 각서에서 서방 열강이 독일 내 혼란을 조장하고 베를린을 모든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전복 음모의 거점으로 삼고 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아울러 6개월 이내에 베를린 점령을 종결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소련은 동독과 단독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어차피 점령체제를 종식시키겠다고 선언했다.
훗날 그가 스스로 철회한 이 과도한 요구들은 정확히 그가 기대한 효과를 냈다. 즉, 위기를 조성하고 연합국 각국 정책의 약점을 하나씩 드러낸 것이다. 크루쇼프는 미국 정치인들 사이에서 타협하려는 성향이 커지고 있음을 포착했다. 실제로 이듬해 제네바 회담에서 미국은 소련을 달래기 위해 베를린 문제의 일부 사안에 대해 양보할 의사를 보이기까지 했다. 강경책이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동독은 서방의 권리를 얇게 잘라내는 이른바 '살라미 전술'을 계속해 나갔다. 동독 당국은 서독 연방의회와 한 난민 단체가 베를린에서 개최하려던 회의를 '동독 주권에 대한 공격'이라는 명분으로 취소하게 만들었다. 또한 동베를린 방문 외교관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는 등 성가신 조치들을 잇달아 시행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서방의 입지를 점진적으로 잠식했고, 결과적으로 동독이 자국 영토를 스스로 통치할 권리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국면으로 흘러갔다.
1961년 빈 정상회담과 케네디의 약점
1961년 6월, 빈에서 크루쇼프는 이번에는 케네디 대통령을 상대로 새로운 공세를 시작했다. 케네디는 전쟁 가능성을 우려스러운 눈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크루쇼프는 미국인들의 약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바로 그들이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신생 행정부 관료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이러한 태도는, 동베를린에서 몰려나오는 난민들을 소련과 더 나은 관계를 구축하는 데 걸림돌로 여기게 만들었다. 결국 그들은 서베를린만 피해를 입지 않는다면 국경 폐쇄마저 사실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동서 관계가 좀 더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기만 한다면 말이다.
정상회담 직후 한 달간 크루쇼프는 베를린 문제를 거론한 중요한 연설을 여섯 차례나 했다. 그는 소련 군사 예산을 25% 증액하겠다고 발표했다. 케네디가 베를린을 놓고 필요하다면 싸우겠다는 서방의 결의를 표명하며 맞섰지만, 그마저도 '서베를린'이라는 표현을 강조했을 뿐, 수도 전역에 관한 기존 협정은 미국과 무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국경 봉쇄 결정과 볼쇼이 극장의 핵협박
8월 초, 바르샤바 조약기구 정상들이 모스크바에 집결했고, 크루쇼프는 동독 지도자 울브리히트가 끝까지 주장해 온 두 베를린 사이 국경 봉쇄에 마침내 동의했다.
크루쇼프는 우주인 티토프의 귀환 환영 행사를 계기로 미국의 '군사적 히스테리'와 서독의 '복수주의 열망의 난무'를 질타하는 충격적인 연설을 했다. 그는 서방에게 '피를 식히라'고 주문하며, 전쟁으로 확전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교묘히 부추겼다. 돌이켜보면 이는 어떠한 군사적 개입도 감행하지 말라는 명백한 경고로밖에 해석될 수 없다. 그는 심지어 주소련 영국 대사 프랭크 로버츠 경을 볼쇼이 극장의 자신의 박스석으로 불러들여, 영국을 파괴하는 데 필요한 폭탄의 수를 일러주기까지 했다.
공산권이 움직여야 할 때
공산 진영이 행동에 나설 때가 분명히 다가와 있었다. 1948년 이후 동독은 이미 200만 명의 인구를 서방으로 잃은 상태였다. 산업 프로젝트는 실행조차 될 수 없었고, 농업은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으며, 잠재적 파업이 생산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었고, 주민들의 이탈을 부추기던 위기는 갈수록 심화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