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니콜라이 1세의 통치부터 러일 관계 악화까지 [러시아 역사]

지난 시간에는 알렉산드르 1세 시대에 나폴레옹이 등장하여 러시아를 침공했고, 러시아가 프랑스군을 격퇴한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또한 발전된 서유럽을 접한 청년들이 자유주의 운동을 시작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자유주의 운동은 발전을 거듭하며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러시아는 이러한 흐름을 활용하는 동시에 휘둘리면서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변화와 함께 유럽 각국, 오스만 제국,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도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들 국가와의 외교 문제를 포함해 러시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니콜라이 1세의 통치기 (1825~1855)

자유주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가운데 알렉산드르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형제 간에 황제의 자리를 서로 양보하겠다는 의사소통 착오로 정치 공백이 발생하자, 청년들은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지휘 체계가 확실하지 않아 곧 진압되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은 사람은 알렉산드르 1세보다 20살 어린 동생 니콜라이 1세였습니다.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청년들의 수가 늘어나던 상황에서 니콜라이 1세의 즉위는 매우 미묘한 국면이었습니다. 아버지 대부터 결성된 비밀결사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알렉산드르 1세는 계몽주의에도 밝았던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에게서 자유주의 사상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니콜라이 1세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나이에 맞이한, 정반대 사상을 가진 아버지 파벨 1세와 폭군적인 행보로 유명했던 형 알렉산드르 1세의 영향 아래 성장했습니다.

* 자유주의 운동은 계몽주의 사상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니콜라이 1세의 즉위 소식을 접한 불만 청년들은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일으킵니다. 이 소요는 신속히 진압되었고, 5명은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약 120명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습니다.

니콜라이 1세는 무엇을 추구했는가?

니콜라이 1세는 거친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혁명 사상을 억누르고 '황제에 의한 전제 정치의 유지'를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데카브리스트의 난 주모자들을 심문하는 과정을 직접 지켜보며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하기는 했지만 농노의 처우 개선을 추진하는 등 유연한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니콜라이 1세는 이러한 전제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정책을 펼쳤습니다.

  • 무조건 복종하는 귀족들을 관료로 기용
  • 자유를 추구하는 세력에 대한 탄압
  • 교육 분야에 개입하여 국민주의(내셔널리즘) 형성
  • 교육 분야에 개입하여 그리스 정교회 신앙을 철저히 실천

후자의 두 가지는 '체제에 반항하지 않는 순복의 정신'을 길러내기 위한 조치였다고 합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유명한 것은 당시 러시아 지배 하에 있던 폴란드의 11월 봉기(1830)에 대한 대응입니다. 결국 봉기는 수적 우위를 점한 러시아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1832년에는 폴란드 입헌왕국이 폐지되어 러시아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11월 봉기의 배경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루이 18세가 즉위했지만, 그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반동 정치를 펼쳤습니다.

그 결과 7월 혁명이 일어나 부르봉 왕조는 다시 무너졌습니다.

이 영향은 유럽 각국으로 파급되어, 네덜란드의 벨기에 혁명, 폴란드의 11월 봉기, 이탈리아의 급진적 자유주의 비밀결사 '카르보나리'의 반란 등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한편 니콜라이 1세는 무역을 통한 더욱 큰 경제 발전을 추구합니다. 이 무렵 러시아는 분업 방식으로 면직물과 설탕 생산을 시작했고, 곡물 생산량도 늘어났습니다. 1837년에는 제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최초의 철도를 건설하는 등 교통망이 정비되면서 대외 수출이 활발해졌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유통 거점과 지중해로 나아갈 불항항(不凍港)이 절실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니콜라이 1세 대부터 보다 공격적인 남하 정책이 채택됩니다.

크림 전쟁 (1853~1856)

크림 전쟁 [세바스토폴 공방전] (wikipedia)

크림 전쟁의 배경은 상당히 복잡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글로 정리하고, 여기서는 간략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당시 프랑스 혁명 이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각국으로 퍼지면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정교회 신자가 많았던 발칸반도 일대에서도 독립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영토·민족 문제를 동방 문제라고 부릅니다.

러시아는 이 동방 문제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켰고, 혁명 전쟁에 개입하는 대가로 지중해로 향하는 항로의 독점 항해권을 획득합니다(← 이 조약은 훗날 폐기됩니다).

여기에 기독교 문제까지 얽히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 정교회의 성지 예루살렘의 관리권을 장악하여 프랑스에 넘겨버리자, 러시아는 '정교회를 경시한다'며 분노했습니다. 1853년에 발발한 것이 바로 크림 전쟁입니다.

정교회가 예루살렘 관리권을 갖게 된 배경

16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 오스만 제국도 세력을 유럽으로 확장하며 국경을 맞대게 되었습니다.

합스부르크와 국경을 마주한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고, 동맹의 징표로 예루살렘 관리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이집트 원정이 단행됩니다.

이 혼란 속에서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이 예루살렘의 관리권을 되찾았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만의 전쟁이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군사 수송을 방해하는 정도로 개입을 제한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하면서 러시아의 낙후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러시아군의 사망자는 35만 명을 넘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니콜라이 1세는 이 전쟁 중에 세상을 떠났고, 뒤를 이어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의 재건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게 됩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장기화된 전쟁 속에 반전 여론이 커지며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영국은 조금 더 싸울 여력이 있었지만, 러시아와의 전쟁의 핵심인 육군을 프랑스에 의존하고 있어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오스트리아가 강화 회담 개최를 호소하면서, 크림 전쟁은 1856년 파리 조약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 결과 러시아는 흑해에서의 함대 유지 및 진출의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의 통치기 (1855~1881)

러시아 재건의 열쇠로서 알렉산드르 2세는 국가의 근대화를 추진합니다. 공장에서 일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농노 해방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귀족들의 반대로 여러 차례 무산되었던 농노 해방이었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꾸준히 설득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61년, 염원하던 농노 해방이 실현되어 영국 산업혁명으로부터 약 100년 뒤에야 러시아에도 산업혁명의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그의 통치기에는 폴란드에서 1월 봉기라 불리는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미국으로부터 알래스카 매각 협상이 제안되어 720만 달러에 이 지역을 양도하기도 했습니다.

알래스카 매각의 이유는 방어가 쉽지 않은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는데, 매각 후 알래스카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미국이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됩니다.

또한 해외 팽창과 연계된 정책으로, 다른 유럽 열강들이 청나라를 침략한 애로우 전쟁(제2차 아편전쟁)을 계기로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 군항을 건설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태평양 함대를 주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하여 병력을 신속히 수송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바로 이 계획이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경계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오스만 제국과의 재대결 — 러시아-튀르크 전쟁

크림 전쟁 이후 흑해 경유 지중해 진출의 길이 막혔던 러시아는, 1870년대 경제가 발전하면서 다시 발칸반도에 손을 뻗기 시작합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불가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듬해 마침내 러시아-튀르크 전쟁(러시아-터키 전쟁)이 발발합니다.

국내적으로는 '같은 기독교 신자를 돕는다', '슬라브 민족의 연대(汎슬라브주의)'라는 명분으로 정리되었지만, 실상은 국내 정치의 대변동으로 인한 불만을 해소하고 발칸반도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나아가 그 너머의 무역로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인 전쟁이었습니다.

러시아는 고전 끝에 승리하였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합니다. 불가리아에 관해서는 러시아군이 2년간 주둔할 수 있도록 하는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크림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남방 확대라는 결과에 다른 열강들은 경계심을 드러냈습니다. 바다로 나아가는 길이 절실한 러시아의 영향 아래 독립한 국가들과 국경을 맞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1918)이 강력히 항의한 것입니다.

이에 독일 제국(1871~1918)이 주도하여 베를린 회의가 개최되었고, 결국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자치국 수준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이 전쟁 직전 삼황동맹(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이 결성되었지만, 발칸반도를 두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베를린 회의에서 처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러시아를 견제하는 눈치를 보며 러시아를 제외한 두 나라는 1879년 독일-오스트리아 동맹(2개국 동맹)을 체결하였고, 러시아와 양국의 관계는 순식간에 냉각됩니다. 러시아의 외교적 발판은 프랑스 쪽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카스피해~몽골 고원 방면으로의 진출

러시아는 18세기부터 이 지역에 진출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동쪽에서 넘어오는 유목민족에 대한 대책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일대에는 코사크들도 진출해 있었고, 카자흐스탄 일대는 그들의 대규모 반란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이 반란을 정부군을 투입해 진압한 것은 로마노프 왕조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예카테리나 2세였습니다.

반란은 계속되었지만,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이 지역은 마침내 러시아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더 남쪽의 여러 국가들도 병합되었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 대에는 이 지역에서 적극적인 경제 개발이 이루어져, 훗날 면화 생산과 면방직 공업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최후

농노 해방이라는 대개혁을 단행했음에도, 민족주의가 확산되는 가운데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에서는 국가에 대한 불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만연해 온 반체제 인사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 끝에, 1881년 그는 반체제 급진 조직 '나로드나야 볼랴(인민의 의지)'에 속한 인물이 던진 폭탄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시기 러일 관계는 어땠을까?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는 크림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시작되었고, 이후 1875년 치시마·사할린 교환 조약(시마 조약)이 체결되며 양국의 국경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이듬해부터 곧바로 먹구름에 덮이기 시작합니다.

일본이 대륙 진출의 교두보인 조선과 강화도 조약(일본-조선 수호통상조약)을 맺자, 극동에서 불항항을 확보하려던 러시아는 조선반도로의 확장을 노리던 일본과 충돌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쓰 사건 (1891)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의 뒤를 이어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자유주의적 기질을 가졌으나, 교육을 받으면서 점차 보수적인 방향으로 기울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아버지가 암살당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안정적인 정치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강권 통치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한편으로는 급속한 산업화와 근대화도 병행하여 추진했습니다.

이러한 알렉산드르 3세는 아들인 황태자 니콜라이(훗날의 니콜라이 2세)에게 세계 각지를 방문할 것을 권했습니다. 니콜라이는 1890년 여러 나라를 순방했고, 마지막으로 일본을 방문한 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기공식을 위해 향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때 일본 정부는 그를 국빈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조선반도를 둘러싼 한일 관계가 미묘해진 상황에서 황태자의 일본 방문에 대해 일부에서는 '군사 시찰이 아닌가?'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가현 오쓰에서 일본 정부의 대응에 불만을 품은 인물이 니콜라이 황태자를 습격해 칼로 베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쓰 사건입니다.

다행히 황태자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러시아 측도 관대한 입장을 취하며 중대한 국제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훗날 일어날 러일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꼽는 사람도 있는 등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의 죽음과 니콜라이 2세의 즉위

오쓰 사건 3년 뒤인 1894년, 일본은 청나라와 조선반도를 두고 약 1년간 청일전쟁을 벌여 대부분의 예상을 깨고 승리합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대륙으로의 본격적인 확장을 시작하게 됩니다. 한편 러시아는 삼국간섭에 참여해 요동반도 반환을 압박하며 남만주로의 영향력 확대를 도모합니다.

그러나 같은 해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 3세가 신장염이 악화되어 붕어하고, 니콜라이 2세가 황제로 즉위합니다.

그는 유럽 방면의 이웃 국가들에게는 우호적인 조치를 취해 알렉산드르 2세 때부터 추진된 프랑스와의 군사 동맹(프랑스-러시아 동맹)을 완성했습니다. 반면 극동에서는 일본과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후 러일전쟁으로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다음 기회에 정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