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앙게랑 드 마리니: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권신, 화려한 출세와 비참한 최후

앙게랑 드 마리니: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권신, 화려한 출세와 비참한 최후

앙게랑 드 마리니(Enguerrand de Marigny)

앙게랑 드 마리니(1260년경 노르망디 리옹라포레 ~ 1315년 파리)는 프랑스 카페 왕조의 국왕 필리프 4세 '르 벨'의 최측근 고문관이자, 사실상 왕국 재정을 쥐고 흔든 실권자였다. 어린 나이에 궁정에 들어간 그는 교양 있고 총명한 인물로서 필리프 4세의 깊은 신뢰를 얻어 한 시대를 풍미하는 권세가로 올라섰으나, 끝내 교수형대에서 비명횡사한 인물이다.

출세의 시작

그의 발판은 왕비 잔 드 나바르(Jeanne de Navarre)의 시종으로 복무하면서 마련되었다. 왕비의 총애를 얻은 그는 그녀의 주선으로 대부녀 잔 드 생마르탱(Jeanne de Saint-Martin)과 혼인하여 신분을 한층 끌어올렸다. 14세기 초 필리프 4세의 총신으로 자리를 굳힌 그에게는 왕실 시중관장(캄벨랭), 롱그빌 백작, 루브르 성 영주 등 당대 귀족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와 부귀가 쏟아졌다.

재정 담당자로서의 권력과 원한

군인이자 외교 교섭가로 두루 활약한 그는 국왕의 핵심 참모 반열에 올랐으며, 특히 재정 문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국왕이 단행한 화폐 개질, 즉 화폐의 금·은 함량을 조절하는 정책을 적극 지지했고, 왕국 재정에 체계적인 예산 운영을 도입하는 데도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잦은 화폐 가치 하락과 세금 인상으로 이어졌고, 민중은 그를 세금 폭탄의 주범으로 여기며 깊은 증오를 품었다. 궁정 안에서도 빠른 출세와 축재는 수많은 원한을 샀는데, 특히 국왕의 동생 발루아 백작 샤를(Charles de Valois)과의 대립은 그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치열했다.

몰락과 처형

1314년 필리프 4세가 서거하자 그의 운명은 급격히 기울었다. 그는 화폐를 변조했으며 플랑드르인들을 위해 국왕을 배신했다는 등 온갖 혐의로 고발당했다. 새 국왕 루이 10세는 그를 죽일 생각이 없어 추방형으로 만족하려 했지만, 이윽고 국왕에 대한 주술(마법) 혐의라는 새로운 고발이 덧붙여지자 바론들의 격노에 그를 내맡기고 말았다.

파리 탕플(Temple) 성채에 감금된 전(前) 왕실 재정 관료는 주교단 회의에 회부되었으나, 심문 하나 받지 못한 채 사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앙게랑 드 마리니는 당시 파리의 대표적인 처형 장소였던 몽푸콩(Montfaucon) 교수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흥미롭게도 루이 10세는 훗날 억울하게 죽은 그의 미망인과 자녀들에게 거액을 하사했는데, 이는 왕 역시 그의 죽음이 부당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