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주의자 튀르고
1761년부터 1774년 루이 16세의 즉위에 이르기까지 앙 로베르 자크 튀르고(Anne Robert Jacques Turgot)는 리무쟁 지방 총독으로서 왕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를 근대화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1774년 8월, 백과전서파 학자이자 자유주의의 선구자였던 그가 재무총감에 임명된 것은 계몽주의 프랑스의 승리로 평가받았습니다.
튀르고의 정책은 무엇보다 공공 지출을 대폭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며, 이는 곡물 무역 자유화, 왕실 부역(코르베) 폐지, 길드와 장인제 폐지로 이어지는 그의 거대한 개혁 청사진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적 개혁은 수많은 저항에 부딪혔고,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이 밀 무역 자유화 이후 촉발된 반란, 이른바 '밀가루 전쟁(Guerre des Farines)'이었습니다.
결국 1776년 5월 12일 루이 16세에 의해 해임된 튀르고는 프랑스의 행정·정치 지도를 새롭게 설계하려던 '지방 자치체(municipalités)' 프로젝트를 실행할 겨를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통치는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희망을 품었으나, 이를 실현하지 못한 군주는 훗날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또 다른 혁명과 마주하게 됩니다.
여론을 의식한 네케르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는 어떤 이들에게는 위대한 개혁가이자 뛰어난 재정 관리자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사기꾼, 나아가 '혁명의 길을 닦은 자'로까지 평가되는, 여론을 양분시키는 기질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제네바 출신 은행가였던 그의 첫 번째 재직 시기(1776~1781)는 프랑스 국민의 호응을 얻은 개혁으로 기억됩니다. 바로 네 개의 지방 의회(provincial assemblies) 창설이었으며, 이는 야심 찬 분권화 구상의 시험대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세금 부담 없이 차관 발행만으로 미국 독립전쟁의 군자금을 조달한 덕분에 그는 군주제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장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네케르는 스스로 '여론(opinion publique)'이라 부른 것에 남다르게 민감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운영하던 살롱은 계몽주의 지식인 서클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었고, 네케르 자신도 1761년 자신의 정책을 변호하는 책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직접 호소했던 슈아죌 공작(Duc de Choiseul)에게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20년 후 『재정 보고서(Compte rendu)』의 출판은 네케르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한층 강화했지만, 동시에 그의 실각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1781년 5월 19일, 이러한 방식이 군주제에 위험하다고 판단한 외무장관 베르젠(Vergennes)의 압박 속에 루이 16세는 네케르를 해임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