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열린 포츠담 회의에서 독일은 연합국과 소련 사이에 분할 점령되었습니다. 그리고 1949년, 독일은 공식적으로 두 개의 국가로 나뉘게 됩니다.
동독, 즉 독일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은 사회주의 체제 아래 소련의 강한 영향력을 받았으며 수도는 베를린이었습니다. 반면 서부 지역은 자본주의 진영에 속해 미국의 영향권 안에 놓였고, 수도는 본(Bonn)으로 정해졌습니다.
이러한 분단은 세계 질서를 지배했던 냉전의 논리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으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약 4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분단된 도시, 베를린
구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조차 이러한 분단의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베를린은 동독 영토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지만, 하나의 도시 안에 두 개의 정치 체제와 두 개의 화폐가 공존하는 기이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처음에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을 위한 구역으로 은밀하게 나누어졌지만, 1961년부터는 물리적 경계인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면서 도시가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1953년에는 동독 노동자들이 더 나은 생활 조건과 자유를 요구하며 베를린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시위는 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잔혹하게 유혈사태로 번졌고, 비무장 시민들에게 발포가 가해졌으며 1만 3천 명에서 1만 5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이런 억압 속에서도 약 300만 명의 독일인들이 목숨을 걸고 서독으로 탈출했습니다.
소련 체제가 동독 주민을 억압하고 통제할수록 사람들의 불만은 커져갔고, 더 많은 이들이 서쪽으로 도피했습니다. 결국 동독 당국은 베를린 시민들이 자본주의 진영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극단적인 해결책을 찾았고, 그 결과물이 바로 장벽이었습니다.
정치 체제
독일민주공화국의 정치 시스템은 소련식 사회주의 조직을 본떴습니다. 통일사회당(SED)이라 불리는 거대한 집권당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고, 그 외 소수 정당들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직접 선거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야당의 창당은 형식적으로나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을 육성한다는 명분으로 각종 사회·문화 단체에 편입되어 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중앙에 망치와 컴퍼스가 그려진 동독의 국기.
정치적 탄압: 슈타지(Stasi)
슈타지(국가보안부)는 사회주의에 반하는 생각을 가진 시민들을 감시하는 비밀경찰 조직이었습니다. 록 음악을 듣거나, 메이데이 집회에 불참하거나, 서방식 옷을 입거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까지도 슈타지에게는 모두 수상한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었습니다.
예술가, 학생, 정치인 할 것 없이 누구나 감시와 조사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여기에는 자의적인 체포, 폭력적인 심문, 고립, 고문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슈타지는 전체 인구의 상당수를 정보원으로 활용하며 사회 전반을 감시망으로 덮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경제 구조
동독 경제는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5개년 계획에 따른 계획경제 체제를 채택했으며, 사유재산은 인정되지 않고 모든 생산수단이 국가의 소유와 관리 하에 놓였습니다. 이 모델에서는 중공업과 군수산업이 최우선적으로 지원받았습니다.
교육, 주택, 의료 같은 국민의 기본적인 필요는 충족되었지만, 정치적·개인적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상품의 종류는 극히 제한적이어서 소비자의 선택권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했습니다.
문화 통제
동독의 문화 창작은 사회주의 이념을 찬양하고 자본주의 세계를 비난하는 데 활용되어야 했습니다. 많은 작품들이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연극, 영화, 서적 등 모든 예술 작품은 노동 계급의 투쟁과 평등한 사회 건설을 위한 노력을 주제로 다루어야 했습니다. 추상주의와 같은 전위 예술은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 경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어떤 예술 작품이든 재현·공연하기 위해서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획일화된 일상생활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동독 사회에는 주택에서부터 의복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획일화가 적용되었습니다. 아파트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형태로 제공되었고, 벽지·장식·가구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옷감의 종류도 적었고 매장에서는 서민들에게 거의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스스로 원피스를 재봉하고 액세서리를 만들어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이러한 표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자동차 산업입니다. 동독에는 트라반트(Trabant)라는 단 하나의 차종만 존재했고, 동독 시민들은 이 차 한 대를 얻기 위해 몇 년씩 기다려야 했습니다. 모델은 단순하고 낡았지만, 그래도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소중한 재산이었습니다.
동독의 상징, 트라반트 자동차.
독일민주공화국의 종말
1980년대에 들어서며 소련 모델은 경제적 피로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주의 산업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사회주의 진영의 공업 제품들은 낙후되었고, 소비 시장도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며 정치적·경제적 개방을 약속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고무된 '철의 장막' 아래 있던 여러 나라들이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동독에서도 젊은 학생들은 교회에 모여 음악을 듣곤 했는데, 이는 곧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 행렬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9년 11월, 한 동독 정치인이 TV 방송을 통해 "장벽이 즉시 개방된다"고 발표하면서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본래 며칠 후 개방한다는 취지였지만, 국민들은 그날 밤 바로 개방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렇게 수천 명의 베를린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고, 분단되었던 도시와 국가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두 국가 사이의 격차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기록적으로 빠른 속도로 재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서독은 동독이 안고 있던 경제적·정치적 부담을 전부 떠안으며 통합 과정을 주도했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냉전의 종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소련(USSR)의 해체를 가속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