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사란 무엇인가
사리사(sarissa)는 길이가 매우 긴 창이다. 그 기원은 놀랍게도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미노아 문명과 초기 아카이아(그리스계) 보병들이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사리사와 일반 창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길이였다. 이 때문에 전사는 반드시 양손으로 무기를 다뤄야 했다.
일반적으로 길이가 3~3.5m를 넘는 창이라면 모두 사리사로 분류된다. 반면 일반적인 창은 길이가 2.5m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고, 전사는 대개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손에는 방패를 쥐었다. 사리사 장병(살리소포로스)들의 최초 팔랑크스는 미노아 문명과 초기 미케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사리사는 '엔코스(엥기)'라고 불렸으며 길이는 약 3.5m 정도였다. 적 전차의 돌격을 막아내는 대응 무기로 당대 전사들의 무기고에 포함되어 있었다.
필리포스 2세와 마케도니아식 사리사
사리사는 오랫동안 잊힌 무기였다. 그러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치세에 '알려진 세계'에서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부 분석가들은 에파미논다스와 펠로피다스가 이끈 테바이 군이 먼저 이 무기를 부활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리사 덕분에 새로운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기존의 전통적 호플리테스 팔랑크스를 압도할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식 사리사는 가장 긴 창의 두 배에 달하는, 6m에 이르거나 때로는 그 이상인 길이를 자랑했다. 몸통은 두 개의 부재를 황동 연결부로 이어 만들었고, 후단에는 황동 추추가 달려 균형을 잡는 동시에 예비 촉 역할까지 겸했다.
사리사는 그리스와 헬레니즘 국가들이 로마에 정복될 때까지 그리스군의 주력 무기로 군림했다. 반면 로마인들은 제국 말기까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비잔티움에서의 재등장
흥미롭게도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에서 사리사는 한동안 부활하여, 주로 이사우리아 왕조 시기에 중무장 보병 '스코우타토이' 부대를 무장시키는 데 쓰였다.
다만 비잔틴인들은 이 경우 3.5m 길이의 사리사를 주로 방어적으로 활용했다. 적 기병과 보병에게 뚫을 수 없는 가시 장벽을 형성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소형 무기로 무장한 경보병이 밀접하게 지원했다.
중세 유럽, 기사에 맞선 롱 스피어
사리사는 적어도 서기 13세기까지 유럽 전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후 보병이 당대의 강력한 상대인 기사(중장 기병)에 맞설 수 있도록 점차 되살아났다.
네덜란드 저지대 국가의 '시민' 창병들이 프랑스 기사단과 벌인 영웅적인 충돌, 그리고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맞선 전투들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이론상으로는 기병이 승리할 희망이 없어야 했지만, 방어 측 보병의 미숙함 때문에 기마 전사들이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사리사가 보병의 기본 무기로서 화려하게 귀환한 것은 15세기 중부 유럽에서였으며, 스위스와 독일이 선두에 섰다.
스위스 팔랑크스와 화력의 결합
당시 창병들은 평균 약 5m 길이의 사리사를 들었다. 스페인은 처음에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더 짧은 무기를 선택했지만,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병사들은 고대의 선배들처럼 방패를 더 이상 들지 않고 양손으로 창을 다루었으며, 매우 깊은 대형을 이루었다 — 테르치오의 경우 50열에 달했다.
이렇게 맞붙은 팔랑크스 간의 충돌은 특히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었지만, 곧 한쪽이 사기가 꺾여 도주하면서 끝나곤 했다.
결국 창병들은 적 팔랑크스의 측면을 공격하는 창이나 장검으로 무장한 병사들의 지원을 받았다. 점차 창병과 석궁병·아르케부스병, 나중에는 머스킷병이 섞인 혼성 부대가 발전했는데, 한쪽은 장병기로 무장한 병사들을 엄호하고 다른 쪽은 화력으로 적 팔랑크스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18세기까지 이어진 명맥
사리사는 18세기까지 보병을 기병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본 무기로 사용되었다. 작센의 모리스 같은 위대한 장군들은 18세기 중반에도 이 무기를 보병 전투의 핵심 무기로 복귀시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프러시아와 러시아 국민방위대 부대에 창이 지급되었는데, 이는 주로 머스킷 부족 때문이었지만 훈련 부족도 한몫했다. 그러나 프러시아는 기회가 되는 즉시 이 부대에 머스킷을 지급했다.
판텔리스 카리카스(Pantelis Karik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