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역사를 바꾼 고대 세계의 위대한 정복자들

수많은 고대 통치자들이 역사책, 소설, 영화, 그리고 비디오 게임 속에 등장하며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저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아마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라는 게임을 하며 처음으로 칭기즈칸과 훈족의 아틸라라는 이름을 접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이끈 정복 전쟁은 그들의 이름을 역사의 모래밭에 영원히 새겨 넣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뛰어난(혹은 끔찍한) 존재로 만들었을까요? 지금부터 우리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된 고대 정복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역사를 바꾼 고대 세계의 위대한 정복자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고대 마케도니아의 왕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입니다. 기원전 356년 펠라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필리포스 2세, 어머니는 올림피아스 여왕이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제우스가 그의 친아버지였다고도 전해집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단 12세의 나이에 야생마 부케팔로스를 길들였고, 이 말은 이후 거의 모든 전투에서 그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13세에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과학, 철학, 문학, 의학을 사사했습니다. 16세 때는 아버지가 전쟁을 나가는 동안 왕국을 대신 통치하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그의 첫 번째 정복은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테베의 신성부대와 맞서 싸운 것이었습니다. 기원전 336년, 아버지가 호위병에게 암살당하면서 알렉산드로스는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페르시아와 그리스 연합군을 격파한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곧 사르디스, 밀레투스, 밀라사 도시들을 차례로 함락시켰습니다. 고르디온에서 그는 고대 전차에 얽혀 있는 전설적인 '고르디오스의 매듭'과 마주하게 됩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매듭을 풀 수 있는 자가 아시아 전체의 통치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손으로 매듭을 풀 수 없었던 알렉산드로스는 검으로 매듭을 잘라내고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합니다.

이후 마라투스, 아라두스, 비블로스, 시돈 등의 도시가 차례로 정복당했습니다. 기원전 332년에는 티레 전투에서 티레 섬을 점령했고,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는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을 간직한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습니다. 기원전 331년에는 다리우스 왕을 격파하고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식 의복, 관습,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이는 마케도니아인들의 반발을 샀고 일부는 그의 죽음을 모의하기까지 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편집증은 존경받던 몇몇 장군들의 처형으로 이어졌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3년, 불과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말라리아로 사망했다고 믿지만,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제국은 그의 죽음과 함께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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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Charlemagne) 또는 카롤루스 대제는 768년부터 814년까지 서유럽 대부분을 통치한 황제입니다. 그의 확고한 신념 덕분에 기독교가 서방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많은 이들이 그를 '유럽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샤를마뉴는 약 742년경 베르트라다 드 라옹과 피핀 3세(소 피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프랑크족의 왕이었고, 76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왕국은 샤를마뉴와 동생 카를로만 사이에 분할되었습니다. 771년 카를로만이 사망하면서 샤를마뉴는 프랑크의 유일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모든 게르만 부족을 통일하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롬바르드족(이탈리아), 아바르족(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바바리아인을 정복하고 기독교를 강요했습니다. 782년에는 베르덴 학살 당시 이교 신을 숭배하던 게르만 부족인 작센인 약 4,500명이 학살되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기독교로 개종을 강요당했고,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살해되었습니다.

기독교 수호자로서 그는 교회에 재물과 토지를 하사하고 교황을 보호했습니다. 그의 권력과 교회와의 관계를 인정받아, 800년에는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로마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황제 재위 기간 동안 샤를마뉴는 교육을 진흥시켰고(학문과 문화의 부흥을 의미하는 '카롤링거 르네상스'), 경제적·종교적 개혁을 단행했으며, 현대 유럽 인쇄 활자의 기초가 된 '카롤링거 소문자' 체계를 시작했습니다. 교육 외에도 그는 체육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집니다.

813년, 샤를마뉴는 아들 경건왕 루트비히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습니다. 다음 해 샤를마뉴가 서거하자 루트비히가 단독 황제가 되었으며, 샤를마뉴는 아헨 대성당에 안장되었습니다.

훈족의 아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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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라는 훈족(370년경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주해 온 유목민족)의 왕이었습니다. 434년부터 453년까지 이어진 그의 통치는 피로 물든 정복으로 가득했고, 그의 이름은 존경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틸라의 정확한 출생 시기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훈족 왕들의 형제인 문주크였고, 형 블레다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434년 삼촌이자 국왕이 사망하자 두 형제는 함께 훈족을 통치했습니다. 아틸라는 특정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예언에 대해서는 깊은 경외심을 보였습니다.

그들의 정복은 437년 프랑스 지역의 부르군트족을 침공하여 학살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훈족은 서로마 제국의 동맹이었고, 동로마 제국은 이 동맹에 반대하며 상당 기간 훈족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435년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음에도, 훈족은 441년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습니다. 로마군이 시칠리아에서 소환되자 훈족은 막대한 전리품과 함께 철수했습니다. 이 침략 과정에서 수많은 도시가 파괴되고 민간인들이 살해되었습니다. 블레다는 철수 이후 사망했는데, 아틸라가 훈족의 단독 통치자가 되기 위해 형을 제거했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450년경 일련의 사건들은 서로마 제국을 아틸라의 적으로 돌려놓았습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의 누이 호노리아와의 혼담이 거절당하자, 아틸라는 서방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아틸라의 여러 적들과 연합하여 그를 맞섰고, 이것이 유명한 카탈라우누스 평원 전투입니다.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아틸라는 철수를 강요당했습니다. 452년에는 다시 제국을 침공해 도시들을 파괴했지만, 로마 주교 레오 1세를 만나 설득당한 후 철수하여 로마 제국의 잔존 영토를 평화롭게 남겨두었습니다.

1년 후, 아틸라는 수많은 아내들 중 마지막인 일디코와 결혼했습니다. 화려한 축배가 벌어진 결혼식 날 밤, 그는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일디코가 그를 살해했는지, 아니면 자연사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묘소 위치는 비밀로 하라는 그의 명령 때문에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매장에 참여한 사람들까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살해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까지도 아틸라의 최후의 안식처는 미궁 속에 있습니다.

칭기즈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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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은 13세기 몽골 제국의 창시자이자 통치자였습니다. 칭기즈칸이 태어난 시기(약 1158년) 몽골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저명한 부족장이었습니다. 칭기즈칸은 테무진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는데, 이는 아버지가 살해한 적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당시에는 아버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자녀에게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테무진이 아홉 살이 되던 해, 예수게이는 적들에게 독살당했습니다. 아버지의 많은 추종자들이 떠나면서 가문의 권력은 무너졌고, 부족과 씨족 간의 전쟁이 일상이 된 가운데 가족은 적들의 공격을 견뎌야 했습니다.

테무진의 권력 행보는 1178년 아내 보르테가 납치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내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그는 권력과 명성을 함께 얻게 됩니다. 1186년 테무진은 몽골의 칸이 되었으나, 이후 몇 년간의 삶에 대한 기록은 빈약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1197년 토그룰(케레이트족의 칸)과 함께 타타르 부족을 격파했습니다. 1202년에는 자신을 암살하려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토그룰 세력 전체를 물리쳤습니다. 케레이트족의 몰락 이후 테무진은 타타르, 메르키트, 나이만, 몽골, 위구르를 차례로 정복했고, 1206년 몽골 영토의 유일한 통치자로 인정받으며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칭기즈칸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핵심은 정복한 부족을 학살하거나 축출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대신 그들을 자신의 지도와 보호 아래 두어 성장하는 군대와 부족에 통합시켰습니다. 정복을 통해 얻은 자원은 병사들에게 분배되었고, 전쟁 중에는 성직자와 장인들이 다치지 않도록 명령했습니다. 칭기즈칸은 가족보다 충성을 우선시했으며, 패배했던 옛 적들조차 충성심을 인정받아 그의 군대에서 장군 자리에 올랐습니다. 또한 하나의 종교를 강요하는 대신 백성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고, 그 자신은 샤머니즘을 믿으면서도 불교 승려, 이슬람교도, 기독교 선교사들과 자주 상의했습니다. 이러한 비범한 통치 방식은 조화로운 몽골 제국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가 사망할 당시 제국의 영토는 카스피해부터 동해(일본해)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또한 실크로드를 하나의 통합된 정치 환경 아래 두어 서양, 중동, 아시아 간의 교류와 무역을 크게 증진시킨 공로도 그에게 돌아갑니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말에서 낙마한 부상이 원인이 되어 1227년 사망했다고 봅니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무덤 위치를 비밀로 하라고 유언했으며, 자신의 초상화나 조각상 제작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첫 초상화는 사망 후 수년이 지나서야 등장했으며, 그의 실제 모습은 대부분 추측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티무르(타메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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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는 칭기즈칸 사후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몽골 대륙을 휩쓴 튀르크-몽골 계통의 통치자였습니다. 그는 티무르 제국과 티무르 왕조의 창시자이며, 재위 기간 내내 칭기즈칸 사후 분열된 몽골 제국을 재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티무르는 사마르칸트 남부의 유목민족인 바를라스 부족의 귀족 타라가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사업'은 어린 나이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절도, 폭력, 그리고 기타 그늘진 행각들이 그러했습니다. 오른쪽 다리로 제대로 걷지 못하고 오른팔을 들어 올리지도 못했기 때문에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의 별명 '티무르이 렝(Timur-i-Leng)'이 붙었고, 이것이 유럽인들에 의해 '타메를란(Tamerlane)'으로 오해되어 전해졌습니다.

권력에 대한 탐욕은 그로 하여금 동맹을 배신하고 옛 동맹의 적들과 손잡게 만들었습니다. 트란스옥시아나가 먼저 그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이어 페르시아의 도시들이 약탈당했습니다. 샤를마뉴가 기독교를 믿었듯이, 티무르는 이슬람이 유일한 참된 종교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무자비한 학살 속에서도 티무르는 장인들만큼은 살려두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자비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고향인 사마르칸트로 강제 이주되어 티무르의 비전대로 수도를 건설했습니다. 그는 사마르칸트가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티무르는 살인, 약탈, 절도 등 이슬람 율법 대부분을 무시하면서 이슬람을 전파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참된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신이 땅에 보낸 '알라의 채찍'이었다고 합니다.

인도, 오스만 제국,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국, 시리아, 바그다드, 터키까지 티무르의 무자비한 검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404년, 티무르가 중국의 명나라를 정복해 원나라를 부활시키기로 결심한 순간, 그는 스스로 자신의 사형선고에 서명한 셈이 되었습니다. 별자리가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말하는 최고의 점성술사들을 믿고 막대한 군대와 함께 출정했지만, 병에 걸려 우즈베키스탄의 시르다리야 강가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사마르칸트의 구르에 아미르 영묘입니다.

기록 속에 남은 정복자들

이들 정복자들의 삶에 대한 기록 상당 부분은 추측과 당시 남겨진 고대 문헌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많은 통치자들의 몰락이 그들의 영토와 운명을 함께 가져갔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는 생전이 아니라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이 지난 후에야 기록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출생과 사망 연도, 전투, 죽음의 방식에 대해 서로 다른 기록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