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9년 10월 11일, 경제학자 알렉산더 삭스(Alexander Sachs)는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에게 20세기 역사의 흐름을 바꿀 한 통의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편지의 발신인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었고, 그 내용은 나치 독일이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조속히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해야 한다는 시급한 호소였습니다.
레오 실라르드가 초안을 쓰고 아인슈타인이 서명하다
편지는 1939년 8월 2일자로 작성되었습니다. 다만 본문의 상당 부분은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가 집필했으며, 그의 동료인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와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도 초안 작성에 참여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그날 편지에 서명함으로써 명분과 권위를 더했습니다.
편지 속 과학자들은 나치 정권이 핵분열 기술을 활용해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사용할 수 있는 지식과 역량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미국의 폭탄 개발을 앞당길 수 있도록 관련 연구를 지시해 달라고 촉구했습니다.
폴란드 침공 소식과 함께 전달된 편지
아인슈타인은 편지를 삭스에게 맡겼지만, 삭스는 즉시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것을 잠시 주저했습니다. 그러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소식에 루즈벨트가 깊은 우려를 표하자, 편지를 전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삭스가 편지의 요지를 간결히 소개하자, 루즈벨트는 즉각 '우라늄 자문위원회(Advisory Committee on Uranium)' 구성을 명령했습니다. 위원회는 같은 해 10월 21일, 국립표준기술연구소 소장 라이먼 브릭스(Lyman Briggs)의 주재로 첫 회의를 열었고, 시카고 대학에서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가 수행할 중성자 실험을 위해 초기 예산 6,000달러를 승인했습니다.
편지에 담긴 경고의 핵심
아인슈타인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지난 4개월간 프랑스의 줄리오(Joliot)와 미국의 페르미, 실라르드의 연구 덕분에, 대량의 우라늄 덩어리에서 핵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를 통해 라듐에 필적하는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현상은 폭탄의 제작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비록 아직 완전히 확실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유형의 폭탄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런 종류의 폭탄 하나를 선박에 싣고 항만에서 폭발시키면, 그 항구 전체와 인접 지역 일부를 손쉽게 파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폭탄은 항공기로 운반하기에는 너무 무거울 것으로 보입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이어진 길고 복잡한 과정
이 편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하여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괴한 무기를 탄생시킨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의 출발점으로 널리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우라늄 자문위원회는 무기 개발에 크게 적극적이지 않았고, 이를 대신한 두 개의 기구인 국방연구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와 과학연구개발국(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 역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연구는 육군 공병단 산하의 맨해튼 관구(Manhattan Engineer District)에 위임되면서, 우라늄 핵분열과 원자폭탄 대량 생산을 목표로 하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서명을 후회한 아인슈타인
흥미롭게도 아인슈타인은 편지를 통해 원자폭탄 개발을 제안했지만, 정작 폭탄 제작 작업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노벨 화학상 수상자이자 그의 오랜 친우였던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에 따르면, 그리고 군축 운동 진영의 여러 증언에 따르면, 상대성 이론의 아버지는 훗날 이 편지에 서명하기로 한 결정을 깊이 후회했다고 전해집니다.
출처: APE-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