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발견

고대 공학의 걸작, 에우팔리노스 터널 수로 — 3년간의 복원 끝에 전면 재개방

고대 공학의 보물로 꼽히는 에우팔리노스 터널 수로가 3년간의 복원 작업과 조명 시설 설치를 마치고 그리스 사모스섬에서 일반인에게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번영한 고대 도시, 사모스

기원전 6세기 중반 사모스는 문화적 성취로 헬라스 세계에서 높은 명성을 쌓은 번영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참주 폴리크라테스의 통치 아래에서는 에게해 최강의 도시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이 시기인 기원전 538년부터 522년 사이에는 헤라 신전, 훗날 황제 칼리굴라가 다시 사용한 궁전, 그리고 에우팔리노스 터널 수로 등 섬에서 가장 뛰어나고 화려한 건축물들이 세워졌습니다.

왜 산을 뚫는 지하 수로였을까?

무역과 항해, 그리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부를 축적한 사모스였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도시에 먹는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폴리크라테스는 메가라 출신의 기술자 에우팔리노스에게 터널 건설을 맡겼습니다. 그는 항구 확장 공사 등 다른 사업도 함께 담당했습니다. 터널은 암펠로스(카스트로)산 너머의 아기아데 샘과 오늘날 피타고리온이라 불리는 고대 사모스 도시·항구 유적지를 연결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샘이 산의 서쪽 끝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터널은 도시 성벽에 닿으려면 산을 동서로 관통해야 했습니다.

고대 공학의 걸작, 에우팔리노스 터널 수로 — 3년간의 복원 끝에 전면 재개방

수로가 반드시 지하에 건설되어야 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폴리크라테스는 적이 지상으로 물을 끌어오는 경우 물 공급을 차단해 도시를 항복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산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숨김으로써 적어도 적들의 침공을 어렵게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역사상 두 번째 '양방향 굴착' 터널

건설에 약 8~10년이 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터널은 길이 1,036미터에 달하며, 양쪽 끝에서부터 굴착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역사상 두 번째 터널로 평가받습니다. 첫 번째는 기원전 701년경에 건설된 예루살렘의 히스기야 터널로, 현재도 견학이 가능합니다.

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체계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아 터널 방향 설정에서 수많은 오류와 수정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반면 에우팔리노스는 성실하고 경험이 풍부한 기술자로서, 양쪽 끝이 정확히 만나도록 하는 기발한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헤로도토스가 남긴 기록

완공 후 약 100년 뒤에 직접 방문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저서 『역사』에서 이 터널을 그리스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꼽으며 그 규모와 정교함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에우팔리노스가 양쪽에서 굴착한 터널을 일치시키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수평·수직 편차 가능성을 모두 고려한 것으로, 그 자체로 경탄할 만합니다. 당시 사모스 출신인 피타고라스가 아직 도시에 거주하며 이 공사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습니다.

에우팔리노스는 먼저 두 굴착 공사의 예상 만남 지점을 계산한 뒤, 작업자들에게 두 터널의 진행 방향을 하나는 왼쪽으로, 다른 하나는 오른쪽으로 바꾸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두 터널이 평행하게 진행되며 일정 거리만큼 벌어져 있더라도 결국 한 지점에서 반드시 만나게 됩니다.

고대 공학의 걸작, 에우팔리노스 터널 수로 — 3년간의 복원 끝에 전면 재개방

하지만 여전히 깊이의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한쪽이 더 깊으면 서로 교차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는 두 터널의 높이를 다음과 같이 조정했습니다. 북쪽 터널은 바닥을 수평으로 유지하면서 천장을 점점 높였고, 남쪽 터널은 반대로 천장선을 수평으로 유지하면서 바닥을 점점 낮췄습니다. 덕분에 두 터널은 예정된 만남 지점까지 갈수록 단면이 높아졌습니다.

흥미롭게도 현대의 조사 결과, 이러한 마지막 조정은 실제로 불필요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두 터널의 방향에는 사실상 오차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수로의 구조와 규모

이 공사는 크게 세 구간으로 나뉩니다. 샘에서 산 북쪽 사면까지 이어지는 900미터 길이의 도관 구간, 산 정상 아래 약 180미터 지점을 관통하는 1,036미터 길이의 에우팔리노스 터널, 그리고 터널 출구에서 옛 성벽까지 이어지는 500미터 길이의 파이프라인 구간이 그것입니다.

고대 공학의 걸작, 에우팔리노스 터널 수로 — 3년간의 복원 끝에 전면 재개방

산 안쪽 터널 입구는 철저히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암반에 높이 1.90미터, 폭 63센티미터의 좁은 출입구를 파서 갱도로 연결했고, 그 끝에는 여러 우물과 저수조가 있었으며, 그곳에서 높이 1.50미터의 터널이 시작됩니다. 또한 터널 곳곳에는 63미터마다 번호와 해당 구간을 담당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수직 표식이 남아 있습니다.

터널 바닥에는 테라코타로 만든 수로가 남쪽 출구까지 이어졌고, 그곳에서부터 도관들이 성벽까지 뻗어 나갔습니다. 이후 물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도시 곳곳의 분수대에 물을 공급했는데, 그 위치는 아직 고고학자들이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터널 자체는 거의 경사가 없으며, 출구 지점의 고도는 입구와 동일한 해발 약 55미터입니다. 반면 내부 수로는 입구에서 약 4미터, 출구에서는 8.90미터 깊이에 이릅니다. 이 수로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약 12,500톤의 석회암을 굴착해내야 했고, 5,000개의 점토 관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대 공학의 걸작, 에우팔리노스 터널 수로 — 3년간의 복원 끝에 전면 재개방

시대를 초월한 업적

당시 기준으로 보면 이 프로젝트는 너무나 방대해서 즉각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는 나침반이나 측량 도구가 없었고, 최초의 수학 종합서인 유클리드의 『원론』이 편찬되기까지는 200년이 더 남아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수로는 1,100년간 끊임없이 기능하다가 서기 5세기에 폐쇄되었습니다. 터널 내부에서 로마 시대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로마인들도 이곳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으며, 터널 중앙부 근처에는 비잔틴 시대의 작은 제단도 남아 있습니다. 잦은 침입과 공격을 겪던 사모스 주민들이 이곳을 피난처로 삼았던 흔적입니다.

재발견과 복원의 역사

터키 지배 시절 잊힌 채 방치되었던 터널은 19세기 말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1853년 프랑스 고고학자 빅토르 게랭(Victor Guérin)이 지하 도관의 북쪽 끝 일부를 발굴했지만 터널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1882년에는 남쪽 절반과 북쪽·남쪽 도관 일부가 복원되었고, 오늘날 입구로 쓰이는 작은 구조물이 세워졌습니다.

1883년에는 독일 고고학연구소의 에른스트 파브리치우스(Ernst Fabricius)가 터널을 탐사하여 최초의 상세 기술과 함께 지형도를 발표했습니다.

독일 고고학연구소가 다시 발굴을 진행하기까지는 1세기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20세기 70년대에 이르러 그리스 정부가 남쪽 입구를 정비하고 관광객이 안전하게 견학할 수 있도록 내부 수로를 덮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안전 문제 때문에 첫 130미터 구간만 일반에 공개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3년간의 작업을 거쳐 터널 전체가 복원되어 전면 재개방되었습니다. 고대 공학의 위대한 유산을 이제 온전히 그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