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캄파니아 지역을 대표하는 고고학 유적지라 하면 단연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입니다. 베수비오 화산의 화쇄류에 뒤덮인 채 그대로 얼어붙은 두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로마 유적으로 손꼽히니까요.
그러나 나폴리 북쪽에는 이들만큼 화려하지는 않아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세 번째 폐허 도시가 있습니다. 화산의 비극은 피했지만 중세에 버려진 이곳에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 바르카를 물리친 위대한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의 무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리테르눔(Liternum)입니다.
리테르눔은 나폴리 대도시권에 속한 주글리아노 인 캄파니아(Giugliano in Campania) 자치구에 위치하며, 정확히는 파트리아 호수(Lago di Patria) 남쪽 기슭에 자리합니다. 면적 약 2㎢, 평균 수심 1.5m의 작은 호수로, 여러 수원에서 물을 공급받는데 그중 바다와 연결된 수로가 있어 물이 짠맛을 띠는 것이 특징입니다. 클라니오 강(Clanius)이 이 호수를 거쳐 티레니아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당시 이 호수는 '리테르나 팔루스(Literna Palus)'로 불렸으며, 북쪽으로는 광활한 늪지대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이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7세기부터는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세운 인도유럽계 민족 오스칸인(Oscans)이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다만 해안을 따라 여러 식민지를 건설한 쿠마이(Cumae)의 그리스인들에게 상당 부분 지배권을 내주어야 했습니다.
이후 이들은 삼니움족에게 정복당했고, 센티눔 전투(제3차 삼니움 전쟁) 이후 로마 공화국의 지배 아래 로마화 과정을 밟게 됩니다.

리테르눔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와의 인연입니다. 카르타고의 항복을 이끌어낸 장본인이자,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 누미디아의 시팍스를 차례로 격파하고 무엇보다 한니발마저 꺾은 그는 '아프리카누스(Africanus)'라는 코그노멘(agnomen)을 얻었고, '프린켑스 세나투스(princeps senatus, 원로원 수석 의원)'로 추대됩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01년에 끝났습니다. 스키피오는 이후에도 정치·군사 경력을 이어갔고, 그동안 그의 군대 참전 용사들은 로마 식민시 지위를 지닌 리테르눔의 땅을 포상으로 받았습니다. 때는 기원전 194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마(Zama)의 영웅에게 운명은 서서히 방향을 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는 한니발을 안티오코스 3세가 다스리는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몰아냈고, 기원전 190년에는 형제와 함께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왕을 격파했습니다(이 전공으로 '아시아'라는 코그노멘이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고대 로마에서 성공은 종종 질투와 의심을 불러일었습니다. 로마로 돌아온 두 스키피오 형제는 패배한 왕에게 관대한 조건을 부여한 데다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입게 되고, 주요 고발자였던 대(大)카토(Cato)는 원정의 회계 기록을 공개할 것을 요구합니다.
분노한 아프리카누스는 이를 거부했고, 그 결과 형이 비난의 화살을 받았습니다. 그는 형을 감옥에서 구출했고, 결국 요구된 제재를 이행했지만, 아프리카누스의 태도는 오히려 그에 대한 새로운 소추 절차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로마를 떠나 리테르눔에 있던 자신의 빌라로 은둔합니다.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올리브 재배에 몰두하고 회고록을 집필하는 동안, 적들은 더 이상 그에게 남은 것이 없음을 깨닫고 비난을 접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183년경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도시가 아니라 이곳에 묻히기를 분명히 유언으로 남겼으니, 조국이 보여준 배은망덕함에 대한 응수였던 셈입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무덤은 오랫동안 망각 속에 잠겼습니다.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1세기 사이에 활동한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와 세네카(Seneca)는 각각 『로마 건국 이래(Ab urbe condita)』와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무덤의 존재를 기록했지만, 그 이후로는 역사에서 흔적이 사라집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무덤에는 동상과 함께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진 비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배은망덕한 조국이여, 너는 내 뼈조차 가질 수 없다." 참고로 전통에 따르면 훨씬 후대에 "...ta Patria nec..."라는 글자만 읽힐 수 있는 묘비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사람들이 이 호수를 '파트리아(조국)'라고 부르게 된 계기가 바로 이것이라고 전해집니다.

스키피오 이후 리테르눔은 두 차례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첫 번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통치기였고, 두 번째는 서기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였습니다. 특히 후자의 발전은 서기 95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도미티아나 가도(Via Domitiana) 덕분이었습니다. 푸테올리(Puteoli, 현 포추올리) 항구를 제국의 다른 지역과 연결한 이 도로는 신누에사(Sinuessa, 현 몬드라고네)까지 아피아 가도와 이어지는 약 49km 구간으로, 리테르눔을 통과했습니다. 덕분에 도시는 어획물 무역, 향료, 도자기 유통망에 동참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해안의 고운 모래로 만든 유리 공업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시기 도시는 주교좌 소재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서기 4세기부터 이탈리아 반도를 황폐화시키기 시작한 잇따른 홍수와 야만족의 침입이 도시의 운명을 바꿉니다. 사람들은 점차 이곳을 떠나 그리스인들이 세운 또 다른 중심지인 인근 율리아눔(Julianum, 현 주글리아노 인 캄파니아)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리테르눔은 버려졌고, 중세에는 베네딕토회 공동체만이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유적지는 19세기 일부 묘비가 발견되면서 다시 빛을 찾았고, 1930년에는 고고학자들이 스키피오의 무덤을 찾아 발굴에 나섰습니다. 행운이 따랐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오늘날 이곳은 고고학 공원의 중심지입니다. 보호 구역 1,540헥타르에 달하는 '포체 볼투르노-코스타 디 리콜라(Foce Volturno-Costa di Licola)' 지역 자연공원에 편입되어 있으며, 그중 85,000㎡가 역사 유적 구역입니다. 유적은 1932년에 공식 확인되었습니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편이지만, 포럼(직사각형 평면, 스키피오의 무덤은 그 포석 아래에 있다고 추정), 캐피톨리움(서기 2세기, 유피테르·유노·미네르바 삼신을 모신 신전), 바실리카(술라 시대로 추정), 극장(안토니누스 시대, 약 1,000명 수용 가능), 성벽, 저수조, 목욕탕, 원형극장, 제국 시대의 네크로폴리스(묘지), 그리고 포럼 바실리카 앞, 로마 장군이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세워진 제단과 상점가(타베르나) 흔적까지 남아 있습니다.
2016년부터 이 유적 단지는 캄피 플레그레이 고고학 공원에 통합되어 누구나 방문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