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타사타(Artaxata)는 오늘날 아르메니아 아라라트주의 도시 아르타샤트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루쿨루스 열전』에서, 이 도시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조언 덕분에 건설되었으며 심지어 그가 공사를 직접 지도했다고까지 기록하고 있다.

아르탁시스 1세, 새로운 수도를 세우다
아르탁시스 1세(아르타샤스 1세)는 기원전 189년부터 로마의 지배가 시작될 때까지 아르메니아를 다스린 아르탁시드 왕조의 창시자였다. 그는 기원전 176년 자신의 새로운 수도로 삼기 위해 아르타사타를 건설했으며, 이 때문에 이 도시는 '보스탄 하요츠(Vostan Hayots)', 즉 "아르메니아인의 궁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5세기에 활동한 역사가 코레네의 모세(모브세스 호레나치)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르타샤스는 예라스크 강과 메츠모르 강이 합류하는 자리를 찾아갔고, 아라라트산에 인접한 언덕들의 입지가 마음에 들어 그곳을 새 도시의 부지로 선택한 뒤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아르메니아의 카르타고'라 불린 도시
아르타사타가 헬레니즘 문화의 위대한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플루타르코스와 스트라본 모두 이 도시가 규모가 크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며 '아르메니아의 카르타고'라고 칭송했다. 반면, 건설 과정에서 한니발이 개입했다는 주장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당시 한니발이 비티니아 국왕의 초청으로 마르마라 해 동안(東岸)의 리비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에게는 프루사(오늘날 튀르키예의 부르사)라는 또 다른 도시의 건설도 돌려진다. 그러나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가 제시한 한니발의 사망 연도는 기원전 183년으로, 아르타사타 건설(기원전 176년)보다 약 7년이나 앞선다.
흥미롭게도 이 해는 그의 평생 숙적이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사망 연도이기도 하다. 리비우스가 두 라이벌의 죽음을 일부러 같은 해로 맞춰 기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대목이다.

플루타르코스가 어디서 한니발과 새로운 아르메니아 수도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를 얻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르타샤스가 도시의 아크로폴리스 위에 해자를 둘러친 요새를 축조하면서 아르타사타가 신전, 목욕탕, 시장, 작업장, 석상들이 가득한 번영하는 경제·정치 중심지로 성장해 갔다는 점이다.
로마 군단의 유입과 네로의 재건
로마인이 오기 직전인 아르타바스데스 2세의 재위 기간(기원전 55~34년)에는 이 지역 최초의 원형극장이 세워졌다. 당시 아르타사타는 새로 정복한 영토에 더 가까운 티그라노케르타에 수도의 지위를 내주었지만, 서기 60년경 로마군의 진격을 앞두고 다시 수도의 역할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듬해, 그 어떤 성벽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가 이끄는 로마 군단을 막아내지 못했고, 도시는 함락된 뒤 철저히 파괴되었다. 황제 네로는 이를 계기로 아르타사타의 재건을 추진하여 왕 티리다테스 1세에게 5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지원하고 건축가와 기술자들을 파견했다. 단 하나의 조건은 도시의 이름을 '네로니아(Neronia)'로 바꾸는 것이었다.
황제가 죽자 도시는 원래 이름인 아르타사타를 되찾았고, 문화적·경제적 영화를 다시 누렸다. 그러나 서기 369년,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잊혔다가 다시 발견된 유적
아르타사타 유적은 1920년대 소련 고고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었지만, 본격적인 발굴 조사는 1970년대에야 이루어졌다. 유적지는 1945년 소련 정부가 건설한 현대 도시 아르타샤트에서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