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빌(Sibyl)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미래를 예언하는 여성을 일컫는 말로, 트로이 전쟁을 예언했다는 전설의 젊은 여성—다다누스(Dardanus)와 네소(Neso)의 딸—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녀는 델포이에 피티아(Pythia) 신탁과 아폴로 신전이 자리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인물로, 파우사니아스(Pausanias)에 따르면 본래 이름은 헤로필레(Herophile)였다고 전해집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기원전 5세기에 처음 시빌을 언급했고, 기원전 4세기의 플라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는 시빌의 수가 너무 많아져, 기원전 1세기에 활동한 로마 학자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Marcus Terentius Varro)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10명의 시빌 목록을 남겼습니다. 헬레스폰토스의 시빌, 프리기아의 시빌, 킴메리아의 시빌, 델포이의 시빌, 쿠마이의 시빌, 리비아의 시빌, 티부르의 시빌, 페르시아의 시빌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흥미롭게도 시빌에게는 남성 판인 '바키스(Bakis)'도 존재했습니다. 바키스는 시빌과 유사한 예언을 펼친 인물들에게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오티아(Boeotia), 아카디아(Arcadia), 아테네(Athens)의 바키스가 특히 유명했습니다.

시빌들의 예언은 신탁과 달리 질문하거나 의를 묻지 않아도 저절로 발설되는 것이었기에, 독실한 사제들은 이 예언들이 잊히지 않도록 책으로 엮기 시작했습니다. 시빌이 열 명이었던 만큼, 그 책들은 권마다 차곡차곡 채워져 갔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인물은 단연 쿠마이(Cumae)의 시빌입니다. 쿠마이는 미세노 곶과 나폴리만에서 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티레니아해 연안에 위치한, 그리스인이 이탈리아 반도에 세운 최초의 도시입니다. 에우보이아(Euboea) 섬 출신 정착민들이 세운 도시였기에, 베르길리우스(Virgil)를 비롯한 작가들은 그녀를 종종 '에우보이아의 시빌(Euboean Sibyl)'이라 불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쿠마이의 시빌은 로마와 직접 얽혀 있습니다. 앞서 '시빌린 책(Sibylline Books)' 관련 글에서 다룬 것처럼, 로마의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Tarquinius Superbus)는 시빌이 제안한 아홉 권의 예언서 구입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시빌은 세 권을 불태워 버리고 나머지 여섯 권에 같은 값을 요구했고, 다시 거절당하자 또 세 권을 태웠습니다. 결국 남은 책이 하나도 없어질까 두려워진 타르퀴니우스는 마지막 세 권을 처음 제시했던 가격 그대로 사들이고 말았습니다.
시빌은 동굴과 바위 틈에서 예언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 쿠마이 유적 한가운데에는 동굴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쿠마이의 시빌이 신탁을 내렸던 장소로 확인됩니다.

이 동굴은 암반을 깎아 만든 인공 공간으로, 길이 131m, 폭 2.5m, 높이 5m에 이릅니다. 구조는 곧게 뻗어 있고 천장은 사다리꼴 형태를 이루며, 독특한 광학적 효과를 자아냅니다. 통로를 따라 빛과 공기가 스며드는 구멍이 아홉 개 뚫려 있고, 동쪽 벽에는 물탱크로 추정되는 여러 방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있으며, 그중 하나에는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돌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통로 끝에는 세 개의 틈새가 있는 아치형 방이 자리하는데, 로마인들은 이곳을 시빌의 방이라 믿었습니다. 다만 동굴의 정확한 건축 연대와 용도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지만, 제정 시대에 분명한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3세기부터 쿠마이 도시와 함께 버려졌던 이 동굴은, 이탈리아 고고학자 아메데오 마우리(Amedeo Mauri)가 재발견하고 탐사하면서 '안트로 델라 시빌라(Antro della Sibilla)'로 명명되었습니다. 이 이름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Aeneid)』 6권에 담긴 묘사에서 따온 것입니다.
입구 옆에는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시빌의 거처를 묘사할 때 남긴 말을 떠올리게 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고고학자들은 근처 바이아이(Baiae, 옛 Bayas)에 있는 복잡한 터널이야말로 쿠마이의 시빌의 실제 거처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이 터널은 지하 지열 흐름으로 이어지는 경로인데, 아이네아스가 지하 세계를 여행하는 장면에서 베르길리우스 자신이 그린 묘사와 놀랍도록 잘 들어맞는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