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발견

물에 잠겼던 원형 도시 고르, 그 중심에 서 있는 페르시아의 신비한 탑 '미나르'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영토를 가로질러 도시와 지역을 차례로 정복했고, 마침내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도에서 남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만나는 도시 고르(Gor)는 결코 쉽게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이 도시는 알렉산더가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별도의 전략을 세워야 할 만큼 끈질기게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전설이 태어났습니다.

댐으로 도시를 잠그다: 알렉산더의 극단적 선택

알렉산더는 근처 협곡에 댐을 축조해 도시가 자리한 평야를 가로지르는 강물을 막았습니다. 강물은 평야 전체를 범람시켰고, 거대한 호수 하나가 생겨났습니다. 이 호수는 놀랍게도 첫 번째 사산조 페르시아 왕이 통치하던 서기 3세기 초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르다시르(Ardashir)는 배수용 터널을 뚫고 댐을 파괴해 물을 빼냈고, 메마른 평원 위로 도시의 폐허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나침반으로 설계된 원형 수도

아르다시르는 같은 자리에 코르 아르다시르(Khor Ardashīr), 즉 고르라 불리는 새로운 수도를 세웠습니다. 페르시아 역사가 이븐 발키(Ibn Balkhi)는 이 도시가 마치 나침반으로 설계된 것처럼 정밀한 치수로 세워졌다고 기록했습니다. 원형 도시라는 발상 자체는 유명한 원형 도시 바그다드가 등장하기 몇 세기나 앞선 것이었습니다.

물에 잠겼던 원형 도시 고르, 그 중심에 서 있는 페르시아의 신비한 탑  미나르

도시는 직경 1,950미터에 달했고, 너비 35미터의 보호 해자가 둘레를 감쌌습니다. 해자는 각 기본 방위점마다 하나씩 난 4개의 문과 점토 벽으로 연결된 4개의 다리를 통해서만 건널 수 있었습니다. 도시 내부는 20개의 방사형 거리와 여러 개의 동심원 거리가 이루는 정확한 기하학적 시스템에 따라 20개 구역으로 나뉘었습니다.

도심 한가운데에는 반경 450미터의 또 다른 벽이 원을 그리며 왕실 건물과 궁전을 감쌌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오래된 원형 배치는 오늘날 현지 풍경 속에서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원래 높이 약 30미터였던 대형 탑의 유적이, 구조의 핵심부만 남은 채 우뚝 서 있습니다.

물에 잠겼던 원형 도시 고르, 그 중심에 서 있는 페르시아의 신비한 탑  미나르

신비한 탑, '미나르'

아랍인들은 이 탑을 테르발(Terbal)이라 불렀지만, 페르시아인들은 미나르(Minar, 문자 그대로 기둥) 혹은 미나렛으로 불렀습니다. 페르시아 특유의 외부 나선형 계단을 두른 디자인이 인상적이지만, 정확히 어떤 기능을 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몇 가지 가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파괴된 계단과 외벽의 두께를 더하면 탑의 폭은 약 20미터로 추산됩니다.

미나르와 불의 사원인 타흐트네신(Takht-e Neshin)은 이 도시에서 화강암 석조로 지어진 유일한 두 건축물입니다. 페르시아 건축 구조의 독특함을 처음 지적한 서양인은 외젠 플랑댕(Eugène Flandin)과 파스칼 코스테(Pascal Coste)였고,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한 사람은 이 탑을 계단탑으로 규명한 에른스트 헤르츠펠트(Ernst Herzfeld)였습니다.

헤르츠펠트의 연구 이전에는 미나르가 곧 타흐트네신 그 자체, 즉 먼지 오염을 막기 위해 꼭대기에 신성한 불을 올려두었던 사원으로 여겨졌습니다.

물에 잠겼던 원형 도시 고르, 그 중심에 서 있는 페르시아의 신비한 탑  미나르

미나르의 용도를 둘러싼 가설들

일부 학자들은 이 탑이 아르다시르 국가 이념의 신성하고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상징하는 동시에, 실용적 기능도 겸했다고 봅니다. 평야로 통하는 주요 진입로인 탕가브(Tangab) 협곡의 요새와 시각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시 계획 단계에서 이런 군사적·감시적 기능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르다시르가 새 도시와 평원을 설계하는 동안 미나르는 전망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시 전체 계획이 미나르를 중심으로 짜여졌고, 동심원과 방사형 패턴은 무려 10킬로미터 바깥까지 이어져 운하와 도로, 성벽의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물에 잠겼던 원형 도시 고르, 그 중심에 서 있는 페르시아의 신비한 탑  미나르

최근 연구에서는 또 다른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인근 높은 수원지의 물이 파이프와 미나르의 빈 내부 공간을 통해 돔으로 흘러들고, 다시 그곳에서 도시 곳곳으로 공급되는 급수탑이었다는 가설입니다.

페르시아를 넘어 이슬람 건축까지 이어진 영향

문헌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 제국의 다른 지역에도 비슷한 탑들이 존재했습니다. 서기 4세기 로마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us Marcellinus)는 나하르 말카(Nahar Malka, 페르시아 수도 크테시폰 근처에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잇던 운하)의 탑을 언급하며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에 비유했습니다.

그리스 역사가 조시무스(Zosimus)는 서기 5세기 말, 알안바르(이라크 중부의 고대 피리사보라) 마을에 있던 여러 탑을 언급합니다. 다만 리처드 고트하일(Richard Gottheil)에 따르면 이들은 고대 지구라트를 개조한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르 미나르의 디자인은 이라크 사마라 대모스크의 유명한 나선형 미나렛에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다시 서기 9세기 아바스 왕조 시대에 건설된 카이로의 이븐 툴룬 모스크로 이어졌습니다.

물에 잠겼던 원형 도시 고르, 그 중심에 서 있는 페르시아의 신비한 탑  미나르

'무덤'이라는 이름 때문에 버려진 도시

고르는 7세기 무슬림 아랍의 침입으로 다시 파괴되었지만 재건의 기회를 맞았습니다. 서기 950년경 아두드 앗다울라(Adud al-Dawla) 왕은 도시 이름을 페로즈아바드(Peroz-abad, 문자 그대로 '승리의 도시')로 바꾸었습니다. 당시 신페르시아어에서 '고르(Gōr)'라는 단어가 무덤을 뜻하게 되어, '무덤 위에 산다'는 뜻처럼 들리는 이름이 불길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이름이 오늘날의 피루자바드(Firuzabad)로 이어졌습니다. 도시는 카자르 시대에 마침내 완전히 버려졌고, 주민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인근 정착지(약 3킬로미터 떨어진 곳)로 옮겨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