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발견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한 포에니 도시 하드루메툼

제3차 포에니 전쟁 당시의 판도 지도를 펼쳐 보면, 세 개의 거대한 세력권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로마, 로마의 동맹국인 누미디아, 그리고 카르타고입니다. 하지만 카르타고의 영토가 균일하게 표시되어 있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그 안에 이질적인 점들이 존재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오늘날 튀니지의 수스(Sousse)로 알려진 하드루메툼(Hadrumetum)입니다. 이 도시는 포에니(카르타고계)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로마 편에 섰습니다.

전설로 남은 카르타고의 건국

카르타고의 건국 전설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입니다. 티레(Tyre)의 왕 마탄 1세의 딸이자 페니키아 공주인 엘리사(디도)가 주인공입니다. 그녀는 동생 피그말리온에 의해 멜카르트 신전의 사제 시카에우스와 강제로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녀가 숨겨둔 막대한 보물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이를 간파하고 보물이 제단 아래 묻혀 있다고 거짓말했습니다. 피그말리온은 시카에우스를 살해하고 제단을 파헤쳤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시신을 본 엘리사는 정원에 숨겨둔 보물을 챙겨 언니 안나와 소수의 수행원들과 함께 티레를 탈출했습니다.

남서쪽으로 항해하던 선단은 게툴루스족의 땅에 닿았고, 엘리사는 자르바스 왕에게 정착할 땅을 청했습니다. 왕은 '소 가죽 한 장이 둘러쌀 수 있는 만큼'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엘리사는 소 가죽을 길고 얇은 끈으로 잘라 비르사(Byrsa, '소 가죽'이라는 뜻) 언덕 둘레를 넓게 감쌌습니다. 튀니스 호수와 세브카 에르리아나 석호 사이의 이 돌출부에 요새를 세우고 디도라는 이름으로 통치한 것이 훗날 '새 도시'를 뜻하는 카르트 하다슈트, 즉 카르타고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기원전 814년으로 여겨집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한 포에니 도시 하드루메툼

전설에 따르면 수년 후 트로이에서 도망친 아이네아스 일행을 태운 배들이 디도를 찾아옵니다. 비너스의 계략으로 아이네아스와 사랑에 빠진 디도였으나, 주피터의 명령으로 머큐리우스가 아이네아스에게 운명을 일깨우자 그는 떠납니다. 버림받은 디도는 자결했고, 이로 인한 원한이 훗날 로마와 카르타고의 숙명을 예고했습니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에서 이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풀어냈습니다.

또 다른 버전에서는 디도가 페니키아 귀족들이 자르바스와의 결혼을 강요하자 자결했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역사적 사실은 더 소박합니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3천 년 말부터 티레, 시돈 등 페니키아 도시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끊임없는 위협을 피해 서쪽으로 시장을 찾아 지중해로 진출하며 이룬 열매였습니다. 그들은 숙련된 항해사가 되어 해상 교역로를 개척하고, 현지 주민들과 협력해 상업 거점을 세웠습니다.

식민지에서 제국으로: 카르타고의 성장

시간이 흐르며 이 거점들은 식민지로 성장했습니다. 사르데냐, 몰타, 시칠리아, 이비사, 이베리아 반도 곳곳에 퍼졌지만, 북아프리카 연안에서 카르타고가 가장 번성했습니다. 실제 건국 시기는 기원전 846~813년 사이로 보며, 기원전 6세기 전반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2세가 모국 티레를 정복하자 카르타고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한 포에니 도시 하드루메툼

커지는 카르타고의 힘은 자연스럽게 경쟁자들과 부딪혔습니다. 먼저 그리스, 그리고 나중에는 로마였습니다. 아이네아스가 세웠다는 라티움의 작은 정착지에서 출발한 로마 역시 강대국으로 성장하며, 서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카르타고와 충돌했습니다. 두 강자 중 하나만 남을 수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그 결말은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이었습니다. 제1차 전쟁(기원전 264~241)은 20년간 이어졌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와 사르데냐에서 쫓겨났으며, 용병 전쟁이라는 내전까지 겪었습니다. 제2차 전쟁(기원전 218~201)은 카르타고가 이베리아에서 광산 자원을 확보해 손실을 만회하려다, 로마의 동맹 도시 사군툼을 포위하며 발발했습니다. 한니발의 활약으로 유명하지만 역시 20년 만에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가혹한 강화 조약과 하드루메툼의 등장

이번에는 조건이 혹독했습니다. 이베리아 영토 상실, 함대 해체(10척만 허용), 1만 탈렌트 배상금, 재무장 금지. 그러나 평화는 위태로웠습니다. 카르타고의 존재 자체가 위협이라 여긴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한다(Carthago delenda est)'고 외쳤고, 자마 전투(기원전 202)에서 패한 한니발이 살아남아 도주한 것도 불안 요소였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드루메툼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한 포에니 도시 하드루메툼

하드루메툼: 카르타고보다 오래된 자치 도시

하드루메툼 역시 페니키아 식민지로 시작했으나, 카르타고보다 앞섭니다. 정확한 연대는 불명이지만, 기원전 1100년경 우티카(Utica)에 첫 교역소가 세워진 뒤 9세기에는 이미 하드루메툼이 존재했습니다. 포에니계 도시이자 카르타고의 영향권 아래 있었음에도, 활발한 항구 활동을 바탕으로 상당한 자율성을 유지했습니다. 풍신이자 다산의 신 바알 하몬(그리스의 크로노스, 로마의 사투르누스와 동일시됨)에게 바쳐진 수많은 기념비가 이를 증명합니다.

카르타고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하드루메툼은 티레와 가디르(카디스), 헤라클레스의 기둥(지브롤터 해협)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시칠리아와 기존 포에니 영토로 통하는 관문이었습니다. 자치권을 가졌다고 해서 카르타고의 그늘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제3차 시칠리아 전쟁(기원전 315~306) 때 시라쿠사의 폭군 아가토클레스의 침공을 받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한 포에니 도시 하드루메툼

시칠리아 전쟁의 역사를 간단히 짚어보면, 제1차(기원전 480)는 시라쿠사의 폭군 겔론이 섬을 통일하려다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마고 원정군에 의해 히메라에서 저지된 사건입니다. 전쟁은 무승부로 끝났으나 카르타고 왕정이 약화되고 공화정이 들어섰습니다. 70년 후 제2차 전쟁에서는 재건된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전역을 노렸으나 실패하고 섬 남서단으로 밀려났습니다(기원전 340).

제3차 전쟁(기원전 315)은 아가토클레스가 시칠리아 내 카르타고 식민지를 점령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카르타고가 반격해 시라쿠사를 포위하자, 아가토클레스는 역으로 아프리카 본토를 치기로 결심하고 기원전 310년 하드루메툼을 점령해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카르타고 공략에는 실패했으나 북튀니스를 2년간 장악하다가 결국 철수, 메시나 등을 잃고 시라쿠사만 지키는 조건으로 강화했습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그리고 제3차 포에니 전쟁

하드루메툼은 이후 피로스 전쟁과 포에니 전쟁의 소용돌이에서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자마 전투 패배 후 한니발이 이 도시를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203년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와 병력을 재정비한 곳이 바로 여기였기 때문입니다. 길이 6.5km의 견고한 성벽(일부는 현재도 잔존)과 내항을 갖춘 안전한 요새였습니다. 한니발은 이곳에서 카르타고로 돌아가 수페테(최고 행정관)로서 재건에 힘썼으나, 그 공적이 오히려 로마의 경계심을 사 기원전 195년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로마의 의구심은 의도적인 제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146) 유발로 이어졌습니다. 조약상 카르타고는 누미디아 왕국을 인정하고 로마 허락 없이 전쟁을 못 하게 되어 있었는데, 기원전 151년 하스드루발 베오타르쿠스가 누미디아의 침공을 막으려다 실패하자, 로마는 이를 구실 삼아 협상을 거부하고 무조건 항복과 내륙 이주를 요구했습니다. 카르타고가 거절하자 전쟁은 불가피해졌습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한 포에니 도시 하드루메툼

8만 대군이 메제르다 강 하구의 우티카에 상륙했습니다. 이 지역 최초의 페니키아 식민지이자, 상업적 라이벌이던 카르타고와 대립해 이전 전쟁에서도 로마를 도왔던 우티카는 보상으로 북쪽으로 힙포, 남쪽으로 카르타고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로마의 편에 선 하드루메툼의 운명

하드루메툼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가 함락되어 집집이 파괴되고, 비르사 성채에서 최후의 5만 명이 노예로 팔려가며, 전설처럼 땅에 소금을 뿌리는 참혹한 운명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로마 속주가 되었고, 불개입을 약속한 도시들은 '자유 도시(civitates liberae)'로 지정되어 특권을 누렸습니다. 우티카가 속주 수도가 되었고, 7개 자유 도시 중 하나인 하드루메툼도 세력권을 넓히고 원로원을 구성하며 자치 화폐를 주조했습니다.

약 1세기 후, 하드루메툼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내전에 휘말립니다. 폼페이우스 장군 가이우스 콘시디우스 롱구스의 2개 군단이 주둔했으나 카이사르가 탈환했습니다.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상륙하다 넘어져 모래를 움켜쥐며 "아프리카, 이제 내가 잡았다!"라고 외쳤다 기록합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한 포에니 도시 하드루메툼

이후 하드루메툼은 비옥한 토지 덕분에 로마의 곡창이자 사헬 양식 암포라 생산지로 번성해 인구 2~3만 명의 대도시로 성장했습니다. 기원후 63년 총독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훗날 황제)의 부정부패에 반발해 봉기하기도 했으나, 트라야누스 황제 때 식민시(colonia)로 승격되고 시민권이 부여되며 완전히 로마화되었습니다.

기독교, 비잔티움, 그리고 이슬람으로

2세기 말에는 이 도시 출신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황제위를 노릴 만큼 로마화되었습니다. 기독교도 일찍이 뿌리내려 카타콤의 수많은 모자이크와 시비(詩碑) 비문이 이를 증언합니다. 3~4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행정 개혁으로 프로콘술라 아프리카가 제우기타나, 트리폴리타나, 비자케나 3개 속주로 나뉘자, 하드루메툼은 비자케나 속주의 주도(consularis)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434년, 히스파니아에서 넘어온 겐세리크의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하며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카르타고를 수도로 삼고 로마에 밀을 강매하며, 노획한 함대로 발레아레스,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를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반달 왕국의 전성기는 1세기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한 포에니 도시 하드루메툼

베르베르족의 반란과 내분으로 약해진 틈을 타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개입, 동로마 제국에 편입시키고 도시명을 '유스티니아노폴리스'로 바꿨습니다. 2세기의 비잔티움 시대는 7세기, 이슬람화한 베르베르족의 거센 공세로 막을 내립니다. 이브라힘 이븐 알아글라브가 이끄는 아글라브 왕조(수니파 최초의 북아프리카 왕조)가 비잔티움을 몰아내고 압바스 칼리파국의 반독립 에미리트를 세웠습니다.

이들은 하드루메툼을 '수사(Susa)'로 개명하고 수도를 카이루안(알아바시야)으로 옮겼으나, 도시는 다시 상업적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당연히 이슬람화가 강요되었고, 이는 세 번째 종교적 격변이었습니다. 앞서 카라칼라와 아리우스파 반달족이 정통 기독교를 박해해 마빌로, 하드루메툼의 펠릭스, 빅토리아누스 같은 순교자를 낳았지만, 알타바의 모로 왕국이 1세기 더 기독교를 지켰을 뿐 북아프리카는 결국 이슬람권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오늘의 수스: 과거와 공존하는 도시

역사적 도시 재건을 거쳐 현재 25만 명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 수스는, 고대 유적들(아크로폴리스, 토펫[성역], 굴착 묘실이 있는 네크로폴리스)을 현대 도심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 남겨두었습니다. 원래의 항구 위치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튀니스 국립 박물관(바르도 박물관 다음으로 중요)은 이 땅을 스쳐 간 모든 문명의 유물을 보존·전시하며 하드루메툼의 긴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