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그리스 남서부 펠로폰네소스 반도 필로스(현 코라)의 한 올리브 과수원에서 발굴된 '그리핀 전사의 무덤'은 근래 그리스 고대 고고학 역사상 가장 놀라운 부장품 묘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무덤에서 나온 보물 가운데에는 폭이 겨우 3.6cm에 불과한 작은 마노석 인장이 있었는데, 바로 이 작품이 그리스 세계의 미술사를 뒤흔들고 있다.

3.6cm 안에 빚어진 거대한 전투 장면
손바닥 위에 얹기도 작은 이 마노석에는 격렬한 백병전 장면이 놀랄 만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 예외적인 작품은 그리스 청동기 시대(기원전 3200~1050년) 예술가들의 기량에 대해 전문가들이 알고 있던 통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있다.

인장의 크기가 워낙 작아 미세한 디테일 상당수는 현미경 검사 후에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 Courtesy University of Cincinnati
신시내티 대학교(미국)의 연구자 샤론 스토커와 잭 데이비스는 고전학 학술지 헤스페리아(Hesperia)에 게재한 논문을 통해, 침입 흔적 하나 없이 온전히 보존된 무덤에서 출토된 천여 점의 귀중품 가운데 발견된 이 인장에 대한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두 고고학자는 2015년 5월, 고대 미케네의 네스토르 궁전 유적 인근 올리브 과수원에서 이번 발굴을 진행했다.
무덤은 황소 몸통과 독수리 머리를 지닌 신화 속 동물 그리핀이 정교하게 조각된 상아 판이 출토된 데서 착안해 '그리핀 전사의 무덤'이라 명명되었다. 무덤에서는 금세공품, 금으로 장식된 상아 칼집을 지닌 청동 검, 벽옥 구슬, 은잔, 목걸이, 그리고 넉 개의 순금 반지까지 쏟아져 나왔다. 이 모든 보물은 기원전 1500년경 매장된 전사의 유해를 장식하고 있었으며, 그가 크레타섬의 그리스인을 일컫는 '미노아'인지, 그리스 본토 출신을 뜻하는 '미케네'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2015년 그리스 필로스의 그리핀 전사 무덤에서 발견된 마노석 인장에 새겨진 전투 장면. © Courtesy University of Cincinnati
석회질 껍질 아래 감춰졌던 걸작
발굴 당시 고고학자들은 퇴적물이 눌러붙어 보기 흉한 원통형 물체도 함께 수습했는데, 정성껏 세척을 마친 뒤 그것이 보석을 조각하는 예술, 즉 글립틱(glyptics)의 걸작임이 드러났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그리스·에트루리아·로마 고대 미술관의 학옗사 소피 데캉은 "기원전 2천 년기 미노아 미술에서 세공석 각인 기법이 얼마나 탁월하게 숙달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발견 당시 단단한 광물 덩어리에 덮여 있던 필로스의 마노석 인장. © Courtesy University of Cincinnati
석회질 껍질이 벗겨지자 나타난 것은 거대한 일대일 백병전의 이미지였고, 그 정교함에 전문가들조차 경탄을 금치 못했다. 논문 공동 저자들은 "무기, 의복, 인체 표현의 디테일 수준은 비길 데 없다"고 적었다. 어떤 부분의 디테일은 불과 0.045cm(0.45mm)에 지나지 않는다. 단단한 마노석의 특성을 고려하면 놀라운 스케일이다. 연구자들은 "일부 요소는 광학현미경 검사 과정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땅에 쓰러진 패배한 전사 조각의 디테일. © Courtesy Department of Classical Studies, University of Cincinnati
3,500년 전의 경이로운 기술
메소포타미아에서 원통형 인장과 함께 약 5,000년 전에 탄생한 글립틱 예술에서, 3,500년 전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이런 경이로운 솜씨를 구현할 수 있었을까? 런던 대학교(영국)에서 강의하는 미노아 인장 분야 최고 권위자 올가 크르즈코프스카가 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녀는 "중기 미노아 시대에 수평축 선반이 도입되면서 마노, 수정, 카넬리언, 녹색 벽옥처럼 단단한 준보석을 조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소피 데캉은 이 유물의 희소성도 강조한다. "청동기 시대 후기 인장 가운데 인물이 표현된 경우는 10% 미만입니다." 그리스 본토의 에게 해 미술에서 전투 장면이 발견된 사례 역시 드물다. 발견자들은 이 유물이 크레타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들은 "필로스의 전투 마노석은 미노아 혹은 미케네 문맥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글립틱 예술의 가장 뛰어난 사례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묘사된 장면의 의미에 대해서는 에게 전설에서 영감을 받은 생사를 건 대결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800년 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아에서 다룬 청동기 시대의 위대한 신화 중 하나일까? 아직 아무도 모른다.
더 알아보기
"The Combat Agate from the Grave of the Griffin Warrior at Pylos", Hesperia: The Journal of the American School of Classical Studies, Athens, Vol.86, n°4, 2017년 10~12월호.
미노아 인장 종합 연구: 전시 카탈로그 "기원의 그리스. 꿈과 고고학 사이"(생제르맹앙레 국립 고고학 박물관, 2014년 10월 5일~2015년 1월 19일), 파리 2014, p.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