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들은 프랑스 성왕 루이(루이 9세)의 죽음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근 그의 유해를 대상으로 진행된 분석 결과는, 제8차 십자군 원정 중 생을 마감한 이 국왕이 평소 건강이 크게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프랑스 왕 성 루이의 내장 유해가 안치되어 있던 성유함
장티푸스? 페스트? 이질? — 여전히 미궁 속에 남은 죽음
성 루이는 1270년 제8차 십자군 원정 도중 튀니스(현 튀니지) 성벽 앞에서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장티푸스 때문이었는지, 페스트 때문이었는지, 혹은 이질 때문이었는지 역사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미해결의 '콜드 케이스'가 필리프 샤를리에(Philippe Charlier)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앙리 4세의 미라화된 머리 감정으로 이름을 얻은 이 고병리학자( paleopathologist)는 문자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으로도 역사의 내장 깊숙이 파고드는 일을 즐깁니다. 그는 수년간 법의인류학과 첨단 기술을 활용해 수백 년 묵은 수수께끼들을 풀어왔습니다.
그렇게 그는 루이 9세(1226~1270), 흔히 성 루이로 불리는 왕의 건강 상태에 주목했고, 놀랍게도 왕의 내장 유해를 직접 분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학술지 포렌식 사이언스, 메디슨 앤 패솔로지(Forensic Science, Medicine and Pathology)에 발표한 논문에서 샤를리에는 2014년, 군주 탄생 800주기를 맞아 진행된 공식 과학적 성유 감정 과정에서 왕의 내장 2그램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경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 루이는 기생충 질환을 앓고 있었다
국왕이 튀니스 앞에서 숨을 거두자 시신 송환 문제가 대두됐습니다. 긴 항해와 폭염 탓에 시신이 빠르게 부패할 것이 우려되어 프랑스로 돌려보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에 따라 십자군 원정에서 순직한 독일 기사들에게 적용되던 관습에 따라 시신을 포도주에 삶았습니다. 뼈와 살점을 분리하기 위한 '탈육(excarnation)' 과정으로, 뼈는 궤에 담고 살점은 피치를 발라 처리한 자루에 넣었습니다. 이후 성유들은 배를 타고 당시 고인이 된 왕의 동생 앙주의 카를(Charles of Anjou, 1227~1285)이 다스리던 시칠리아로 향했습니다. 내장은 팔레르모 인근 몽레알 베네딕트회 수도원에 안치되어 무려 600년간 보관되었고, 뼈와 다른 장기는 생드니 대성당과 그 왕가 묘지로 계속 여행을 이어갔습니다. 필리프 샤를리에가 분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팔레르모 유해의 작은 샘플이었습니다.

[사진] 성 루이의 미라화된 장에서 발견된 성체 주혈흡충(편형동물)의 주사전자현미경 이미지(1,700배 확대). 출처: 필리프 샤를리에
주사전자현미경(SEM)으로 얻은 초고해상도 이미지 덕분에 샤를리에와 연구진은 루이 9세가 실제로 기생충 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지중해 분지, 아프리카, 근동 지방이 원산지인 주혈흡충(Schistosoma haematobium) 성체 수컷이 다량 검출된 것입니다. 이는 왕이 심각한 형태의 주혈흡충증(schistosomiasis)에 걸려 있었음을 의미하며, 감염이 7월 17일 북아프리카 상륙 이전에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 루이는 튀니스에 도착하기 전부터 전반적으로 크게 쇠약해진 상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 국왕은 불과 4주 만에 사망했는데, 피부를 통해 침입한 주혈흡충이 성체가 되기까지는 7주가 걸리므로 기생충이 성숙할 시간조차 없었던 셈입니다.
샤를리에는 "성 루이는 그보다 이전, 1250년 나일 삼각주의 다미에타(Damietta)에서 포로로 잡혔을 때, 혹은 이후 4년간 아코, 카이사레아, 야파에 머무는 동안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합니다. 물론 이 기생충증만으로 오늘날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국왕의 죽음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연구는 그 실마리를 한 단계 더 좁혀주는 귀중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성유의 긴 항해 — 700년에 걸친 왕의 내장 행방
600년간 시칠리아에 보관되던 성 루이의 왕실 내장은 1861년, 가리발디의 혁명군에게 축출된 두 시칠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프란체스코 2세(François II de Bourbon-Siciles)의 가방과 함께 섬을 떠났습니다. 1894년, 임종을 앞둔 그는 유해를 알제와 카르타고의 대주교이자 백색 신부회 창립자인 라비제리 추기경(Cardinal Lavigerie)에게 맡겨 루이 9세가 숨을 거둔 북아프리카로 되돌려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성유함에 봉안된 내장은 1890년 5월 카르타고 대성당 봉헌식 때 성당에 헌납되었고, 1965년에는 튀니스의 성 잔다르크(Sainte-Jeanne d'Arc) 교회로 옮겨졌습니다. 왕의 내장은 1985년 북아프리카를 떠나 생드니 교구로 안치처를 옮긴 뒤, 1999년에는 베르사유의 생루이 대성당에 자리를 잡으며 오늘에 이릅니다.
* 출처: Ph. Charlier, F. Bouchet, R. Weil, B. Bonnet, "Schistosomiasis in the mummified viscera of Saint Louis (1270 AD)", Forensic Sci. Med. Path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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