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에서 위르겐 하버마스까지, 1929년생 가운데는 서독(연방공화국)의 시대를 빚어낸 인물들이 많습니다. 귄터 가우스(Günter Gaus)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1929년 11월 23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태어난 그는 과일·채소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는 15세 소년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종전 직전 징집되어 네덜란드에서 참호를 팠고, 로켓 추진 유탄과 권총을 들고 브라운슈바이크 일대를 누비기도 했지만, 다행히 적과 직접 교전하는 일 없이 전쟁을 겪었습니다.
배디셰 차이퉁에서 시작된 언론인의 길
연합군이 브라운슈바이크에 입성하면서 전후 시대가 열렸습니다. 가우스는 아비투어를 마치고 '브라운슈바이거 차이퉁'에서 신문 일을 배웠고, 이후 뮌헨으로 옮겨 그곳의 언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언론인이라는 직업은 넓은 세계, 세련된 탐정, 정치적 중재자, 그리고 적당한 보헤미안의 혼합처럼 보였다."
1952년 '배디셰 차이퉁'에서 편집자로 첫 발을 디딘 그는 4년 뒤 '도이체 차이퉁 운트 비르츠샤프츠차이퉁'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에리카 부첸가이거와 결혼해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고, 정치 기자로서의 커리어는 순식간에 치솟았습니다. 루돌프 아우구슈타인의 러브콜을 받아 1958년 함부르크의 '슈피겔' 정치부 편집자가 되었고, 3년 후에는 '쥐트도이체 차이퉁'으로 이직했습니다.
독일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유명한 등
1960년대 초, 새롭게 출범한 ZDF는 이 예외적인 젊은 기자에게 주목했습니다. 가우스는 '취어 페르존 – 물음과 답으로 그린 초상'이라는 자신만의 인터뷰 시리즈를 만들자는 제안을 받습니다. 첫 방송은 1963년 4월 10일, 당시 경제장관이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게스트였습니다. 이후 방송사와 프로그램 명칭은 SWF, WDR, DFF, ORB 등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가우스는 40년 넘게 이 시리즈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회고록에서 "돌이켜보면 내 텔레비전 인터뷰는 내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고 적었습니다.
가우스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에서 크리스티안 클라르까지, 한나 아렌트에서 루디 두치케까지 정치·문화·학계 인사 250명 이상을 인터뷰했습니다. 그의 질문은 날카롭고 분석적이면서도 때로는 무방비할 만큼 순수해서, 어떤 게스트들은 그 앞에서 무장 해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주간지 '프라이탁(Freitag)'은 "거의 모든 대화가 끝나면, 이러저러한 사실만 알고 있던 사람에 대해 마치 정연하게 쓰인 전기를 읽은 듯 더 잘 알게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평했습니다.
인터뷰어로서 가우스는 철저한 순수주의자였습니다. 스튜디오는 미니멀하게 꾸며졌고, 어두운 배경 앞에 안락의자에 앉은 두 사람만 비칩니다. 그중 가우스 본인은 오직 뒷모습으로만 등장했는데, 덕분에 '독일 텔레비전에서 가장 유명한 등'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1965년 그는 SWF의 라디오·텔레비전 프로그램 책임자가 되었고, 1969년에는 '슈피겔'로 돌아와 편집장을 맡았습니다. 이후 당적 없이도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가장 영향력 있게 지지하는 인물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동베를린 상주대표부의 협상가
1973년 언론인 가우스는 정치 무대로 진입합니다. 동베를린 주재 서독 '상주대표' 초대 대표로 임명된 것입니다. 그는 이 임무에 대해 "내가 맡았고 상상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매혹적인 직업"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핵심 협상가로서 그는 남북 독일 간 교류의 수많은 개선을 성사시켰습니다. 함부르크–베를린 고속도로 건설과 환승 통행 절차 간소화 등을 가능케 한 17건의 협정이 대표적인 그의 공적입니다.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은 가우스를 인터뷰에서뿐 아니라 외교 협상에서도 "불편한 존재이되 흔들리지 않고 곧은 사람"이라고 평했습니다. 동베를린에서의 활동을 통해 가우스는 어떤 서독인보다 깊이 동독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특히 사회적 위계가 거의 없다는 점을 좋아했습니다.
1976년 가우스는 SPD(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합니다. 그러나 신임 총리 헬무트 슈미트와의 불화 끝에 1981년 직위에서 물러났고, 잠시 베를린의 과학·예술 담당 시의원을 지냈습니다.
'조국 독일'을 향한 사유
1980년대 가우스는 일련의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6월의 독일』이든 『독일은 어디에 있는가』든, 책 제목 자체가 그의 생각이 조국 독일을 떠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타게스차이퉁'의 정치 기자로 활동하는 딸 베티나 가우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버지는 끝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는 평생의 주제를 찾았습니다. 바로 조국에 대한 사랑, 그리고 조국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걱정이었습니다."
성급한 통일에 반대하다
귄터 가우스는 베를린 장벽 붕괴 후 환호로 들뜬 사람들 가운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재편을 서두르지 말고, 통일이 '맥주 공짜 축제'로 타락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고 경고했습니다. 대신 두 개의 독일 국가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를 포함한 '중앙유럽 연합' 구상을 제안하며 독일 간 관계가 신중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했지만,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990년 가우스는 좌파 주간지 '프라이탁'의 공동 편집인이 되었고, 2001년 가을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 연대"를 선언하자 SPD를 탈당했습니다.
크리스타 볼프가 기억하는 '고결한 사람'
회고록을 쓰던 중 가우스는 암에 걸렸습니다. 오랫동안 살았던 함부르크 인근 라인베크에서 2004년 5월 14일 세상을 떠났으며, 베를린 도로테엔슈타트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오랜 친구였던 작가 크리스타 볼프는 부고문에서 이렇게 추모했습니다. "그를 위해선 옛스러운 말을 써야 합니다. 그는 품위 있었습니다. 시민적 용기가 있었습니다. 연민을 느끼고 남을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무대 뒤에서 잊힌 많은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는 고결한 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