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하인츠 에르하르트, '목에 악당이 있다'던 독일의 전설적 코미디언

유머 작가, 배우, 작곡가, 카바레 예술가, 시인으로 두루 활약한 하인츠 에르하르트(Heinz Erhardt)는 자신을 두고 "목에 악당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거의 35년을 살며 독일을 대표하는 국민 코미디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글쓴이: 카리나 베르너

하인츠 에르하르트의 공연이 끝난 후 한 관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정신이 있어야 저렇게 어리석게 행동할 수 있는가?" 에르하르트가 연기한 '어리석음', 즉 서투르고 무기력하며 심지어 보수적인 인물들을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도 유쾌하게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유머리스트는 함부르크에서 거의 35년을 보냈으며, 1979년 6월 5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파란만장했던 어린 시절

하인츠 에르하르트는 1909년 2월 20일 리가에서 발트 독일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는 이별했고, 어머니는 러시아의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아버지는 하노버로 가서 유명 지휘자로 독일 전역을 순회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여러 번 파트너를 바꿨습니다. 에르하르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불평할 수 없었죠. 아버지는 점점 셋이 되고, 어머니도 그만큼 늘어났으니까요."

그는 리가에서 대형 음반 가게를 운영하던 조부모 슬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고향에서 여러 차례 '납치'당하기도 했는데, 때로는 러시아에서 어머니와, 때로는 독일에서 아버지와 살았습니다. 거처가 바뀔 때마다 학교도 바뀌었습니다. 불안정한 유년기 속에서도 피아노만은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4살에 첫 레슨을 받았고, 10대부터는 고전 작품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유머러스한 시를 낭송하던 솔로 엔터테이너

할아버지의 권유로 17세의 에르하르트는 라이프치히의 음악 상점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더 큰 열정으로 공부했습니다.

2년 후 그는 할아버지의 음악 사업을 돕기 위해 리가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에르하르트는 이 일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치즈를 파든 음악을 파든 별다를 게 없죠. 결국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뿐이니까요." 그는 음악상으로서는 무기력하게 활동했지만, 솔로 엔터테이너로서는 뜨거운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유머러스한 이야기와 시, 노래로 첫 무대를 꾸몄습니다.

음반 가게와 무대를 오가던 시절, 그는 훗날 아내가 되는 길다 자네티(Gilda Zanetti)를 만나 평생을 함께하게 됩니다. 그녀는 에르하르트의 매니저이자 인생의 엔진이 되어주었습니다. 베를린에서 운을 시험해보라고 격려한 사람도 바로 그녀였습니다.

제3제국 시절, 슬픈 표정이 그의 '상표'가 되다

1938년 에르하르트는 베를린으로 건너가 한 예술 에이전시에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카바레 예술가 페터 이겔호프(Peter Igelhoff)가 아프게 되자, 에르하르트는 '이겔호프 대역'으로 브레슬라우의 극장에 보내졌지만 관객들에게 야유를 받았습니다.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그는 슬픔, 무기력, 좌절이 가득한 표정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그 순간 관객들이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슬프고 무기력해 보이는 얼굴은 그의 '상표'가 되었습니다. 베를린으로 돌아온 그는 '코미디언의 카바레'에 합류하며 이름을 알렸고, 아내와 딸, 장모는 1939년 그를 따라 베를린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유명 댄서 라 야나(La Jana)와 함께 독일 전역을 순회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에르하르트는 자신을 정치적인 인물로 여기지 않았고, 나치와 전쟁 범죄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경력 발전이라는 목표가 그를 온전히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41년 11월, 그는 더 이상 전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징집되어 슈트랄준트 해군 음악대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복무했고, 이후 킬로 옮겨졌습니다. 가족은 그리 멀지 않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농장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함부르크에서의 새로운 시작

"하인츠 에르하르트 씨, 즉시 함부르크로 오십시오. 중요한 제작에 차질이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몇 달 뒤인 1945년 여름, 에르하르트는 여배우 그레테 바이저(Grethe Weiser)로부터 이런 전보를 받았습니다. 제작은 무산되었지만, 그 대신 에르하르트는 영국 점령군으로부터 방송 허가를 받은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 함부르크의 NWDR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곳에서 에르하르트는 라디오 시리즈 'So was Dummes'(그런 바보 같은 일)의 진행을 맡았습니다. 이 쇼는 청중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영국인들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웃을 수 있는 유일한 독일인"이라고 그를 평했습니다.

1947년 에르하르트는 코미디 영화 '부자여도 행복하라'로 배우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이뤄냈습니다. 이후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는 한편, 카바레와 버라이어티 쇼에서도 솔로 무대를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1948년 그와 가족은 함부르크 북부 빌링스뷔텔의 작은 집으로 이사했고, 그곳이 그의 평생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스크린 속 하인츠 에르하르트

에르하르트는 영화와 TV 영화에도 진출했습니다. 1957년 '피곤한 테오도어(Der müde Theodor)'에서 잼 제조업체 역으로 첫 주연을 맡았습니다. '딸 다섯의 홀아비', '아빠, 엄마, 아홉 아이' 같은 코미디에서 매력적이고 서툰 아버지 역할을 그려내며 스타 반열에 올랐습니다. 1960년대에는 '미미는 살인극 없이는 잠들지 않는다', '배를 탄 세 남자' 등의 영화를 한해 최대 3편씩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한 에르하르트 팬은 신문에 이런 공개 서한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 지겨운 평범한 영화는 그만 두시죠. 시청자를 잃고 싶으신 겁니까?" 무대에서든 스크린에서든 에르하르트는 대체로 거리의 서툴고 사랑스러운 '바보 같은 남자' 유형을 연기했습니다. 그는 살인자 역할도 한번 해보고 싶어했지만, 아내의 만류로 무산되었다고 합니다.

스크린 너머의 '진짜' 에르하르트

현실에서 에르하르트는 영화에서 연기한 다정한 가장 역할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수많은 투어와 스케줄 탓에 네 자녀와 집에서 함께하는 시간은 드물었습니다. 그는 일 중독자였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오히려 예외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결코 좋은 사람도, 좋은 아버지도 아니었다." 에르하르트는 성공이 줄어들까 두려워 늘 일에 매달렸습니다. 1971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거의 쉬지 않고 일합니다. 돈을 벌려는 것도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돈 생각은 거의 하지 않지만,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휴일도 없고, 무엇보다 아프면 안 됩니다."

뇌졸중으로 찾아온 은퇴

1960년대 후반부터 통증과 피로의 신호가 커졌지만 에르하르트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1971년 12월, 그는 뇌졸중을 겪었습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한쪽이 마비되었고, 처음에는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지만 몇 년에 걸쳐 다시 걷는 법을 익혔습니다. 하지만 더 큰 타격은 뇌의 언어 중추가 손상되어, 죽음이 올 때까지 한 마디도 말할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딸 그리트(Grit)는 "아버지에게 그 7년 반은 지옥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는 컬트적 인기

팬들은 그를 잊지 않았고, 1만 5천 통이 넘는 편지가 그에게 도착했습니다. 70번째 생일에는 독일연방공화국으로부터 대십자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1979년 6월 5일, 에르하르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무덤은 함부르크 올스도르프 공동묘지에 있습니다. 그는 직접 작별 인사를 써두었습니다.

"당신은 음악가이자 시인이었으며
화가이자 토끼 사육가였습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당신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에르하르트는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물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인기는 식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