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난넨(Henri Nannen)은 독일 대표 주간지 슈테른(Stern)의 창간자이자 발행인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언론계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고향 엠덴(Emden)에 쿤스트할레 엠덴(Kunsthalle Emden) 미술관을 세운 미술품 수집가이자 후원자로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1996년 10월 13일 하노버에서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에는 이름이 직업처럼 기억되는 인물이 드물지만, 난넨은 적어도 두 분야에서 확실한 자취를 남긴 사람이었습니다. 잡지 슈테른의 창간자·편집장·발행인이자, 미술품 수집가이자 후원자. 두 가지 열정은 모두 어린 시절부터 그를 매료시킨 것이었습니다.
동프리슬란트의 소년, 뮌헨에서 꿈을 키우다
언론인으로서 비범한 경력을 쌓은 뒤 은퇴 후에는 예술에 몸을 바친 인생이었습니다.
앙리 난넨은 1913년 12월 25일 동프리슬란트(East Frisia)의 항구 도시 엠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클라스(Klaas)는 자물쇠 장인 출신으로, 훗날 경찰관으로 근무했습니다. 난넨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마친 뒤 서점에서 견습 생활을 했고, 20세에 미술사 공부를 위해 뮌헨으로 향했습니다. 그의 언론인 커리어 역시 뮌헨 방송국 라이히스렌더(Reichssender)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1937년, 그는 '국가 권위에 대한 저항' 혐의로 소송에 휘말리며 대학을 떠나야 했고 언론 활동도 금지당합니다. 당시 엠덴 지역 나치당(NSDAP)이 난넨에게 유대인 여자친구가 있다며 뮌헨에 고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나치 시대의 굴곡, 그리고 종군기자
출판사 후고 브루크만(Hugo Bruckmann)이 그를 감싸면서 소송은 무산되고 처벌도 해제됩니다. 난넨은 브루크만 출판사에 들어가 잡지 디 쿤스트(Die Kunst)에 집필했지만, 렘브란트를 다룬 유대인 작가의 책을 평론하는 바람에 다시 국가사회주의자들의 눈밖에 나게 됩니다. 결국 1939년 국방군에 징집된 그는 종군기자로 복무하며 예비군 중위까지 진급했습니다.
하노버에서의 재기 — '슈테른'의 탄생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난넨은 1946년 하노버에서 다시 언론인으로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하노버셰 최신 뉴스(Hannoversche Neueste Nachrichten)의 편집자로 시작해 자유민주당(FDP) 계열 신문 아벤트포스트(Abendpost)의 편집장을 거쳤습니다. 같은 시기 그는 청소년 잡지 지크작(Zickzack)을 토대로 새 잡지 슈테른을 설계합니다.
1948년 8월 1일, 35세의 난넨은 슈테른 창간호를 신문 가판대에 올립니다. 40페니히에 16페이지 분량, 표지에는 눈을 감은 배우 힐데가르트 크네프(Hildegard Knef)의 초상이 실렸습니다. 연예와 정치를 절묘하게 섞은 이 기획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슈테른은 곧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잡지로 성장합니다.
편집장으로서, 그리고 '앙리 경'
난넨은 편집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열망이 컸고, 자신이 지닌 지분을 매각합니다. 1951년 게르드 부처리우스(Gerd Bucerius)가 슈테른의 과반 지분을 인수했고, 이후 요한 야르(John Jahr), 리하르트 그루너(Richard Gruner)와 함께 소유 구조를 갖춥니다. 흥미롭게도 슈테른이 벌어들인 막대한 이익은 부처리우스가 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에서 감당하던 수백만 마르크의 적자를 메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내부에서 '앙리 경'이라 불리기를 좋아했던 난넨은 20여 년간 급변하는 언론 환경 속에서도 슈테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1971년 약 400명의 여성이 공개적으로 낙태를 선언한 '우리는 낙태합니다(Wir haben abgetrieben)' 캠페인을 비롯해 화려한 표지 기사들로 전국적인 화제를 여러 차례 일으켰습니다. 그는 잡지를 정치적으로 좌파 자유주의 노선으로 유지하는 한편, 노출된 모델을 표지에 등장시키며 시대정신을 자극하기도 했습니다.
난넨이 편집장직을 내려놓은 것은 1980년 말이었고, 이후 새로이 마련된 발행인 직책을 맡았습니다.
히틀러 일기 위조 사건: 말년의 거대한 좌절
위조된 히틀러 일기 스캔들은 슈테른을 깊은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1983년, 70세 생일을 앞두고 슈테른과 영원히 작별하고 싶었던 난넨에게 그해 봄 벌어진 히틀러 일기 위조 사건은 연방공화국 최대의 언론 스캔들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출판사 내부 조사는 발행 책임을 난넨에게 묻지 않았지만, 그는 언론 대기업의 추락이라는 책임을 함께 짊어져야 했습니다.
후학을 위한 유산: 에곤 에르빈 키시 상에서 앙리 난넨상까지
언론 활동 외에도 난넨은 동료·후배 기자들을 아낌없이 지원했습니다. 1977년에는 독일어 우수 보도 문학에 수여하는 에곤 에르빈 키시 상(Egon-Erwin-Kisch-Preis)을 제정했습니다. 2005년부터는 이 상이 슈테른과 출판사 그루너+야르(Gruner + Jahr)가 신설한 앙리 난넨상(Henri-Nannen-Preis)의 7개 부문 가운데 하나로 편입됩니다. 당시 슈테른 편집장 토마스 오스터코른(Thomas Osterkorn)은 2004년, 이 명명에 대해 "'슈테른'이 오늘날에도 난넨의 삶의 작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현재 난넨상은 여러 부문에서 독일어권 언론인 전체에 개방되어 있으며, 에곤 에르빈 키시 상은 여전히 최고의 텍스트 보도에 주어지는 인쇄 부문 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젊은 인재 육성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78년 그루너+야르 CEO 만프레트 피셔(Manfred Fischer)와 함께 함부르크 저널리즘 학교를 설립했으며, 이 학교는 오늘날 앙리 난넨 학교(Henri-Nannen-Schule)로 불립니다.
쿤스트할레 엠덴: 수집가가 남긴 기념비
앙리 난넨과 에스케 난넨은 쿤스트할레 엠덴의 대표 후원자였습니다. 이 언론인의 초상화 또한 그곳에 걸려 있습니다.
1979년 난넨은 두 번째 열정인 예술로 시선을 돌립니다. 함부르크에서 '앙리 난넨 미술상회(Henri Nannen Kunsthandel)'를 열고 이듬해 현대 미술의 중요한 작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70세 생일을 맞아 그는 20세기 독일 회화를 중심으로 한 자신의 컬렉션을 고향 엠덴에 기증하고, 아울러 상당한 사재를 들여 미술관 쿤스트할레 엠덴 건립을 추진해 1986년 10월 3일 개관에 이릅니다. 난넨은 이러한 헌신에 대해 "먼지를 머금은 채 즐거운 잡지만 만들다 끝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취지의 말로 이유를 밝혔다고 전해집니다.
영예로운 명예 시민권, 그리고 마지막
엠덴 시는 1989년 창간자에게 명예 시민권을 수여해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이는 독일연방공화국 공로십자훈장, 니더작센주 메달 등 그가 받은 영예들과 더불어 그의 삶을 빛내줍니다.
앙리 난넨은 1996년 10월 13일 하노버에서 82세를 일기로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에는 아들과, 미술관 운영을 이어받은 세 번째 아내 에스케(Eske)가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