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루미나 소피(Lumina Sophie): 마르티니크의 반인종차별 운동가

차별로 점철된 청년기

루미나 소피(Lumina Sophie)는 노예의 후손으로, "쁘뤼프리즈(Surprise)"라는 별명으로도 불린 인물(1848~1879)입니다. 그녀는 마르티니크에서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지속된 차별과 인종주의에 맞서 일어선 반인종차별 운동가였습니다.

루미나 소피는 1848년 11월 5일 마르티니크 보클랭(Vauclin)에서 마리-필로멘 소피(Marie-Philomène Sophie)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마리 소피(Marie Sophie, '줄마(Zulma)'로 알려짐)는 1848년 4월 노예제 폐지령으로 막 자유를 얻은 직후였습니다. 태어난 아이에게는 '쁘뤼프리즈'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 외할머니 렌 소피(Reine Sophie), 삼촌과 이모들로 이루어진 대가족과 함께 라브뤼(La Broue) 농장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가족은 작은 토지를 일구며 커피나무, 카카오나무, 바나나나무를 재배했습니다.

쁘뤼프리즈가 여섯 살이 되던 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대가족은 흩어졌습니다. 줄마와 딸은 보클랭 근처 샹플뢰리(Champfleury) 농장으로 이주해 여러 작물 재배, 사탕수수와 커피 수확, 시장 판매, 바느질 등 다양한 활동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어머니 곁에서 재봉사로 일하고, 인근 농장의 일용직 노동자나 시장 상인으로 일하며 쁘뤼프리즈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활 실태를 가까이에서 목격했습니다. 특히 세금과 교육 기회에서 농촌 주민들이 겪는 불평등을 몸소 경험했습니다. 노예제 폐지가 한참 지난 지 얼마 안 된 마르티니크에서 특권 계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고수하려 했고, 차별은 만연했습니다. 쁘뤼프리즈는 이러한 현실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21세가 되던 해 쁘뤼프리즈는 에밀 시드니(Emile Sidney)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노예제 폐지 이전부터 자유의 몸이었던 흑인 가문 출신인 에밀은, 마르티니크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불평등과 농촌 주민들의 처우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키우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미 운동가로 이름을 알리던 쁘뤼프리즈는 열정적인 연설과 강한 의지 덕분에 본명 필로멘(Philomène)과 '빛'을 연상시키는 '루미나(Lumina)'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남부 마르티니크의 대봉기

1870년, 젊은 흑인 레오폴 뤼뱅(Léopold Lubin)은 최초의 유럽 정착민 후손인 백인 크레올 거주자, 이른바 '베크(béké)'인 오지에 드 망트농(Augier de Maintenon)에게 길을 비켜주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그 대가로 말에서 끌어내려져 승마용 채찍으로 구타당했습니다.

두 달 후 뤼뱅이 같은 방식으로 복수하자, 그는 즉시 체포되어 무거운 형량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판결은 즉각적인 연대의 물결과 대규모 봉기를 촉발했습니다. 9월, 루미나 소피는 리비에르필로트(Rivière-Pilote) 시장 광장에 모인 군중 가운데 있었습니다. 같은 달 22일, 남부 마르티니크 전역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임신 두 달 차였음에도 루미나는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루미나를 포함한 분노한 군중은 라 모니(La Mauny) 저택으로 행진했습니다. 그곳에는 뤼뱅 사건 배심원단의 일원이었던 코드(Mr. Code) 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공개적으로 뤼뱅을 유죄로 몰았다고 자랑했고, 노예제 시대를 상징하는 백기까지 게양하고 있었습니다. 코드는 일곱 발의 총탄에 맞았고, 마르티니크 15개 지방자치단체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습니다. 군대가 동원되어 봉기는 9월 26일 진압되었습니다. 그날과 이후 몇 주간 500명의 봉기 참가자가 체포되고 열여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75명이 형을 선고받았으며, 그중 8명은 사형당했습니다.

루미나 역시 체포된 봉기 참가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두 차례의 재판에서 그녀는 '반란의 불꽃', '무리의 여왕', '갱단 두목 중 가장 무서운 인물'로 묘사되었습니다. 방화범이라는 혐의에 더해, 남성을 지배하려 한다거나 여성으로서의 본분을 부정한다는 비난까지 쏟아졌습니다.

1871년 4월, 루미나는 감옥 당국이 '테오도르(Théodore)'라고 이름 붙인 아들을 낳았지만,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그녀에게서 떼어졌습니다. 아이는 14개월 후 감옥에서 요절했습니다. 같은 해 6월, 루미나는 가옥 방화와 봉기 가담 혐의로 종신 중노동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루미나 소피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생로랑드마로니(Saint-Laurent-du-Maroni) 형무소로 추방되었습니다. 프랑스인 수감자와 강제로 결혼한 뒤, 그녀는 8년 후 질병과 학대로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땅 위에 움막을 하나 갖고 계신다면 나는 그것을 태워버릴 겁니다. 하느님은 틀림없이 늙은 베크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