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베르너 핀츠너: 함부르크 성 파울리의 청부살인마, 경찰청 심문실에서의 비극적 최후

1980년대 함부르크의 홍등가 성 파울리(St. Pauli)에서 가장 무자비한 청부살인자로 악명을 떨친 베르너 핀츠너(Werner Pinzner). 1986년 7월 29일, 베를리너 토어(Berliner Tor) 경찰청 4층 심문실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으로 그는 독일 범죄사에 길이 남게 된다. 심문 도중 돌연 권총을 꺼내 담당 검사와 아내,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차례로 끊은 것이다.

경찰청 심문실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사건

1986년 7월 29일 화요일,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베르너 핀츠너는 아내 유타(Jutta)와 나란히 경찰청 418호실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청부살인자를 위한 음료와 빵이 놓여 있었다. 이 자리에는 핀츠너의 변호사, 검사 볼프강 비스트리(Wolfgang Bistry), 경찰관 두 명, 그리고 속기사가 동석해 있었다.

핀츠너는 추가 범행을 자백하겠다고 예고한 상태였다. 심문이 시작되려는 순간, 핀츠너는 "신사 여러분, 이것은 인질극입니다!"라고 외치며 갑자기 권총을 뽑아 들었다.

머리에 맞은 총탄은 검사 비스트리를 중상으로 쓰러뜨렸다. 두 경찰관은 간신히 방을 빠져나가며 총탄을 피했다. 도망친 경찰관들이 경보를 울리자 구급차와 헬리콥터가 경찰청으로 달려왔다. 4층에서 핀츠너는 딸 비르기트(Birgit)와 전화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비르기트, 사랑한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변호사에게 시계를 건네며 딸에게 물려주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 속기사 기타 베르거(Gitta Berger)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아내 유타에게로 몸을 돌렸다.

핀츠너와 아내는 즉사했다. 비스트리 검사는 에펜도르프 대학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이튿날 4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범인, 베르너 핀츠너는 누구인가

1947년 4월 27일, 함부르크 브람펠트(Bramfeld)에서 라디오 정비공의 아들로 태어난 핀츠너는 중퇴 후 운전사, 선원, 비계공, 타일공, 정육점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딸을 두었고, 이후 유타와 재혼했다.

1975년 8월, 공범 두 명과 슈퍼마켓을 강도질하다 점장을 총으로 쏴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 헤로인과 코카인에 손을 댔고, 출소 후 성매매 업계의 '큰손'이 되겠다는 꿈을 꾸게 된다. 당시 성 파울리에서는 포주 조직이 수백 명의 성매매 여성을 지배하며 막대한 이권과 지위를 과시하고 있었다.

핀츠너는 1980년대 초, 훗날의 공범 아르민 H.(Armin H.)와 의뢰인인 오스트리아 출신 페터 N.(Peter N.)을 만났다. 페터 N.은 성 파울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에이즈 공포로 성매매 수요가 줄어들고 코카인이 새로운 수익원으로 떠오르면서, 이권 다툼은 주먹다짐에서 총격전으로 격화되었다. 양심의 가책 없는 인물이 필요했고, 핀츠너가 그 적임자였다.

연쇄 살인 행각

핀츠너의 살인 수법은 단 한 발의 헤드샷(머리 관통상)이었다. 첫 의뢰로 수만 마르크를 받고 전 매춘업주이자 마약상 예후다 아르치(Yehuda Arzi)를 살해했다. 코카인 대금을 떼먹고 협박하던 자였다.

이후 매춘업 동업자 페터 파일마이어(Peter Pfeilmaier)를 매복해 죽였다. 페터 N.이 그의 지분을 차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 희생자 디트마르 트라우프(Dietmar Traub)는 파트너가 코카인을 너무 많이 쓴다는 이유로, 네 번째 희생자 발데마르 다머(Waldemar Dammer)는 페터 N.을 공개적으로 모욕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핀츠너와 공범은 다머와 그의 직원을 동시에 사살했다.

사용한 무기는 '아르미누스(Arminius) 38 스페셜' 리볼버였다. 이 총은 드문 '우측 10회 전강(ten turns right twist)' 강선을 가져 탄두에 미세한 흔적을 남겼고, 이 탄도 증거가 수사의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1985년 5월, 검찰과 경찰은 특별수사본부 '조코 855(Soko 855)'를 꾸렸다.

특별수사본부 '조코 855'의 수사

수사 지휘 검사는 볼프강 비스트리였다. 그는 함부르크 조직범죄 소탕에 주력하며 '현장 중심'이지만 '위험을 무릅쓰는' 스타일로 알려졌다. 1986년 초, 성 파울리 내부자의 제보로 결정적 단서를 잡아 핀츠너 체포에 나섰다.

4월 15일, 경찰 특공대는 슈타일쇼퍼 슈트라세 77번지 핀츠너의 아파트에서 그를 속여 끌어냈다. 목욕 중이던 핀츠너는 젖은 머리에 스타킹만 신은 채 밖으로 나왔고, 현장에서 살인에 쓰인 권총이 발견되었다. 체포 직후 핀츠너는 배후 인물을 폭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수사팀은 추가 범행 여부를 캐물었지만, 핀츠너는 시간을 끌며 구치소에서 변호사를 포섭해 마약을 공급받고 아내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는 자신이 '끝장'났음을 알았다. 석방되면 조직원들에게 살해당할 것이고, 감옥에 남기도 싫었다. 정기 면회 시간 동안 핀츠너와 변호사는 최후의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공범자들: 변호사와 아내

핀츠너 변호를 맡은 여변호사(이름 비공개)는 함부르크 최고위급 로펌 소속이었다. 명성과 보수만 좇은 게 아니었다. 정신질환을 앓는 남편 문제로 힘들어하던 그녀는 핀츠너 부부의 기묘한 공생 관계에 휘말렸다. 유타 핀츠너에게 감정이입하며 마약 밀반입을 도왔고, 이는 협박의 빌미가 되었다. 결국 그녀는 살인 도구인 권총을 구해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변호사의 도움으로 유타는 권총(스미스앤웨슨)을 행주에 싸서 팬티 속에 숨기고 긴 치마로 가린 뒤 심문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가방에 총을 옮겨 담으면 핀츠너가 재빨리 꺼내 쓸 수 있도록 짜인 계획이었다.

전직 은행원이던 유타는 남편에게 철저히 의존했다. 편지에는 애칭 '무키(Mucki)'나 '나의 게일루스(mein Geilus)'를 쓰며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신과 함께 부드럽게 떠나고 싶다"고 적었다. 남편의 계획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기꺼이 죽음의 동반자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자발적으로 죽음을 앞서간 아내, 법과 도덕의 통제력을 상실한 변호사. 두 여성의 도움으로 핀츠너는 1986년 7월 29일, 살인자살이라는 '화려한 퇴장(Exitus Triumphalis)'을 연출했다.

사건의 파장과 결말

이 유혈 사태는 함부르크 정계와 행정부에 거대한 스캔들이 되었다. 경찰청과 교도소의 보안 허점이 도마 위에 올랐고, 수사당국이 핀츠너에게 지나치게 편의를 제공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내무·법무 장관(모두 사민당 소속)이던 롤프 랑에(Rolf Lange)와 에바 라이트호이저(Eva Leithäuser)는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여당이던 사민당은 핀츠너 사건 직전까지 압승이 예상되던 1986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성 파울리의 판도도 바뀌었다. 핀츠너의 변호사는 살인 방조죄로 징역 6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었다. 의뢰인 페터 N.은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2000년 석방되었다.

핀츠너가 최후를 맞이한 418호실은 이제 없다. 고층 빌딩은 리모델링되었고 경찰청도 이전했다. 베를리너 토어 교차로를 오가는 차량과 행인 중 35년 전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볼프강 비스트리 검사의 동료들과 친구들은 여전히 그날의 비극과 숨진 검사를 잊지 않고 있다.

본 다큐멘터리는 함부르크 경찰 박물관, 함부르크 검찰청, 함부르크 주립 문서보관소, 그리고 함부르크 성 파울리 소재 레스토랑 "춤 질버작(Zum Silbersack)"의 협조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