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엘리자베스 1세: 잉글랜드의 '처녀 여왕', 튜더 왕조 마지막 군주 (1558~1603)

엘리자베스 1세: 잉글랜드의  처녀 여왕 , 튜더 왕조 마지막 군주 (1558~1603)헨리 8세와 앤 볼린의 딸 엘리자베스 1세는 1558년부터 1603년까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여왕으로 재위했다. 이복언니 메리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며,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다. '처녀 여왕'이라고도 불리는 그녀는 오랫동안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를 누려왔으며,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왕이자 최고의 군주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엘리자베스 시대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유례없이 찬란했던 시기로, 활발한 예술과 문학 활동이 꽃핀 때였다. 그녀의 통치 기간에는 산업과 상업도 크게 발전하여 1566년 런던 증권거래소가 설립되었고, 특히 동인도 회사를 비롯한 여러 특허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순탄치 않았던 즉위 과정

엘리자베스가 1558년 왕좌에 오른 것은 결호 조건 속에서가 아니었다. 1533년 그리니치에서 태어난 그녀는 헨리 8세의 두 번째 아내 앤 볼린의 딸이었는데, 앤 볼린은 결국 국왕의 명령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어머니의 추문성 있는 평판은 어린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그대로 따라붙었고, 이는 그녀의 재위 내내 일부 기간 동안 지속되는 그림자가 되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헨리 8세의 왕위 계승 서열에서 첫 번째가 아니었다. 먼저 에드워드 6세와 제인 그레이(그레이는 단 9일간만 재위)가 짧은 통치를 했고, 그다음으로 헨리 8세와 첫 번째 아내 카타리나 데 아라곤 사이의 딸인 메리 튜더(메리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엘리자베스 1세: 잉글랜드의  처녀 여왕 , 튜더 왕조 마지막 군주 (1558~1603)쓸쓸하고 학구적인 어린 시절을 보낸 엘리자베스는 메리 1세 재위 기간에도 고난을 겪었다. 1554년 와이어트의 반란에 연루되면서 런던탑에 몇 주간 유폐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1558년 왕위에 올랐고, 1559년 1월 15일 웨스트민스터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사생아라는 신분, 어머니의 평판, 그리고 1547~1558년 기간의 온갖 음모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것으로 의심받았던 전력 때문에 즉위 직후부터 완전히 인정받는 여왕이 될 수는 없었다.

종교 문제

메리 튜더 치세에 자신의 가톨릭 신앙(おそら크면 위장이었을 것)을 드러냈던 바로 그 사람이 성공회 교회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다만 이 시기 여왕의 정확한 역할과 그 동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진정한 실용주의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태도는 1559년 통일법과 수권법의 통과로 이어졌고, 1563년 39개조 신조로 확정되었다. 이러한 결정을 통해 그녀는 주교들에게 충성 서약을 요구했으며, '교회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성공회는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물론 가톨릭 진영(교황 비오 5세는 1570년 그녀를 파문했고, 가톨릭 신자들은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에서 반발이 있었는데, 이는 스페인과의 긴장이라는 맥락과도 맞물려 있었다. 또한 일부 개신교 신자들, 곧 훗날 '청교도'라고 불리게 되는 이들은 그녀의 종교 정책이 캘뱅주의로서는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고 로마 가톨릭과 너무 타협적이라며 비판했다. 그럼에도 바로 이러한 모호성 덕분에 잉글랜드의 종교 전환은 비교적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통치 방식

여왕의 통치 방식 역시 실용주의로 일관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초기에는 메리 튜더의 참모진 대부분을 유임시켰지만, 성직자들을 정부에서 배제하여 순수하게 세속적인 정부 조직으로 만들었다. 노련한 국무장관 윌리엄 세실을 필두로 한 파벌이 그녀 주변에 형성되었고, 여왕은 이 추밀원과 함께 나라를 통치했다. 이를 통해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주요 과제인 의회와의 관계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의회는 엘리자베스 재위 기간에 전임자들보다 소집 빈도가 줄었지만, 오히려 더 잘 통제되었다. 여왕은 종교 문제 해결이나 스페인과의 분쟁 시에는 의회의 힘을 빌릴 줄 알았고, 필요할 때는 권위주의적 모습까지 보였으며, 참모들은 의원들과 능숙하게 협상을 벌였다. 그래서 의회가 진정한 견제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통치 말기에 이르러서였다.

메리 스튜어트 문제

엘리자베스 1세: 잉글랜드의  처녀 여왕 , 튜더 왕조 마지막 군주 (1558~1603)성공회 교회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엘리자베스는 메리 스튜어트라는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에 직면했다. 메리는 이미 엘리자베스가 즉위할 때부터 그녀의 위협이었지만, 가톨릭 세력이 스코틀랜드 여왕 편을 들면서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갈등으로 번졌다. 엘리자베스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부추겨 메리를 압박하는 방식으로 대응했고, 결국 메리는 1567년 아들 제임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해야 했다. 잉글랜드로 피신했던 메리는 엘리자베스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유폐되었다.

그러나 유폐된 후에도 메리 스튜어트는 여왕 엘리자베스에게 여전히 위험한 존재였다. 가톨릭 세력의 지원을 받았고, 특히 1570년 교황의 파문 이후 더욱 그러했는데, 그녀는 끊임없이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의심받았다. 여왕은 이 상황을 여러 해 견디다가 결국 1587년 메리를 처형하기로 결심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대외 정책

엘리자베스의 통치는 잉글랜드의 해양·식민지 팽창이 본격화된 시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장애물도 적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스페인이 그것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 잉글랜드의  처녀 여왕 , 튜더 왕조 마지막 군주 (1558~1603)

개신교를 지지하던 여왕은 우선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개신교 반군('물떼새'라 불리던)에게 접근했고, 이것이 첫 번째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도화선은 아일랜드 문제와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이었다.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는 영국의 간섭을 받고 있었는데, 엘리자베스는 1560년부터 종교 개혁을 강요했고, 이어 '잉글랜드화'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1570년대 말 반란을 촉발시켰다. 아일랜드는 스페인의 동맹이었고, 특히 엘리자베스가 레스터 백작의 군대를 보내 네덜란드 반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자 스페인은 결국 전쟁으로 맞섰다. 1588년 영국 해군에 흩뿌려지고 파괴된 유명한 무적함대의 에피소드는, 이처럼 누적된 갈등 속에서 국고 재정까지 압박하던 엘리자베스의 고충을 가려주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잉글랜드는 해외 팽창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탐사(1580년대), 동인도 회사 설립(1600년), 북미 식민지 건설(월터 랠리 경이 '처녀 여왕'을 기려 명명한 버지니아)이 바로 이 시기의 일이다. 1560년대부터 영국 선원들은 체계적인 탐사에 나섰고, 존 호킨스 등이 대표적인 예로 포르투갈과 스페인 선박과의 경쟁에도 뛰어들었다. 그들의 항해는 러시아, 아프리카, 유프라테스 강, 심지어 인도 무굴 제국의 궁정까지 이어졌다.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 잉글랜드의  처녀 여왕 , 튜더 왕조 마지막 군주 (1558~1603)엘리자베스 신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그녀 스스로 만들어간 독신 이미지다.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다. 로버트 더들리나 에식스 백작 로버트 같은 애인이 있었다는 추측과 함께 이 주제를 두고 수많은 논쟁이 이어져 왔다. 한편 그녀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 이반 뇌제, 심지어 훗날 프랑스 국왕이 되는 앙리 3세에 이르기까지 가장 명망 높은 구혼자들을 모두 거절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정치적 이유였다. 외국 군주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구혼자 중 훨씬 많았던 잉글랜드 귀족들 사이의 균형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종교 역시 중요한 변수였다. 성공회 교회의 '최고 통치자'가 매우 가톨릭적인 스페인 국왕과 결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580년대에 이르러 그녀가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후계자를 낳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자 후계자를 정할 필요가 생겼다. 1601년, 헨리 8세의 여동생과 결혼했던 제임스 4세의 증손자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황금기였나?

여왕의 개성, 통치 방식, 그리고 그녀 자신의 '선전'은 그녀를 잉글랜드의 특별한 시대를 살아낸 거의 신화적인 군주로 만들었다.

엘리자베스 1세: 잉글랜드의  처녀 여왕 , 튜더 왕조 마지막 군주 (1558~1603)

하지만 위대한 여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화를 잘 내는 성격, 권위주의, 때로는 결정을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 그리고 네덜란드 개신교도에 대한 원조 같은 몇 가지 실책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그녀가 남긴 것은 가난해진 나라였고, 통치 말기는 의회와의 갈등, 전쟁, 고독으로 점철되었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 시대는 예술과 문화가 크게 발전한 시기이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예는 단연 셰익스피어일 것이다. 경제도 호황을 누렸는데, 통치 말기 전쟁 비용으로 다소 진세가 꺾이긴 했다. 또한 사회는 깊은 변화를 겪으며 농업은 새롭게 적응해야 했고, 해상 무역은 주로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입지를 굳혀갔다.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 세상을 떠났고, 그녀와 함께 튜더 왕조도 막을 내렸다. 스튜어트 가문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서 뒤를 이었다. '처녀 여왕'이라는 신화 너머에서 엘리자베스의 통치는 성공회 교회 확립의 완성, 해양 팽창, 그리고 하나의 문화와 문명으로서의 자립이라는 점에서 잉글랜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여왕의 신비로움과 개인적 매력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참고 문헌

- M. Duchein, Elisabeth I of England, Fayard, 1992.

- J. Chastenet, Elisabeth 1st, Marabout, 1983.

- L. Crété, The Tudors, Flammarion, 2010.

더 읽을거리

- The Virgin Queen, 영국 TV 영화, DVD,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