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왕족과 비극 사이, 카트린 드 메디치 아이들의 운명

프랑스의 왕비이자 섭정, 세 명의 프랑스 국왕과 한 명의 스페인 왕비를 길러낸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édicis)의 인생은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했던 역할은 바로 어머니였으며, 자녀들을 최고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끊임없는 암투와 정치적 술책을 감행해야 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카트린 드 메디치와 남편 앙리 2세 사이에서 태어난 열 자녀의 생애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프랑수아 2세(François II)

카트린 드 메디치와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첫째 아들이자 왕세자였던 프랑수아 2세는 1544년 1월 19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1559년 7월 10일, 기사 대회 도중 창 부상으로 아버지가 요절하면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앙리 2세가 아들에게 물려준 것은 혼란에 빠진 왕국이었습니다.

기즈 공작과 콩데 공작 간의 정치적 다툼, 개신교도들과의 종교 분쟁까지—너무나 일찍 왕이 되어야 했던 젊은 군주에게 짊어진 책임은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의 보좌에도 불구하고 프랑수아 2세는 왕국의 평화를 유지하기에 역부족이었고, 결국 권력의 실권을 아내 메리 스튜어트(스코틀랜드 여왕이자 잉글랜드 왕위 계승 주장자)의 외삼촌들인 기즈 공작과 로렌 추기경에게 맡기게 됩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즉위한 지 1년여 만에, 젊은 왕은 심한 귀 통증—아마도 중이염으로 추정됩니다—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겨우 16세였던 프랑수아 2세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요절했고, 동생 샤를 9세가 새로운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왕족과 비극 사이, 카트린 드 메디치 아이들의 운명

엘리자베트 드 프랑스(Elisabeth de France)

첫째 딸이자 차녀인 엘리자베트 드 프랑스는 1545년 4월 2일 퐁텐블로 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 앙리 2세는 아직 프랑스의 도팽(왕세자)에 불과했으며, 이듬해에야 왕위에 올랐습니다. 엘리자베트는 오빠 프랑수아 2세의 미래 아내이자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와 함께 교육받으며 자랐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전쟁 중이던 시기, 양국 간 강화 조약에는 엘리자베트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혼약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어린 공주는 겨우 14세였고, 미래의 남편은 34세였습니다.

그러나 비극적인 사건이 축제의 분위기를 깨뜨리고 엘리자베트의 스페인 행을 늦춥니다. 앙리 2세가 기사 대회 중 눈에 박힌 창 파편으로 사망한 것입니다. 젊은 신부는 마침내 1559년 11월 18일 프랑스를 떠나 스페인으로 시집갔습니다. 이 결혼에서 두 딸이 태어났지만, 엘리자베트는 임신 5개월차에 겨우 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깊은 슬픔 속에 남겨진 남편을 안타깝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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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드 프랑스(Claude de France)

카트린 드 메디치와 앙리 2세의 다섯째 자녀 클로드 드 프랑스는 1547년 11월 12일 퐁텐블로 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아버지의 고모였던 클로드 왕비를 기리는 의미로 지어졌습니다.

언니와 올케 메리 스튜어트에게 교육받으며 자란 클로드는 11세의 어린 나이에 로렌바르 공작 샤를 3세와 혼인합니다. 이 결혼에서 공주는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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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드 프랑스(Louis de France)

1549년 2월 3일 퐁텐블로 성에서 태어난 루이는 카트린 드 메디치와 앙리 2세의 넷째 자녀이자 차남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오를레앙 공작령을 받아 '루이 3세'라 불렸으며, 앙리 2세 부부는 차남을 위해 많은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 닥친 것은 비극이었습니다. 루이 드 프랑스는 두 돌이 채 되지 않은 1550년 10월 24일 세상을 떠나며 온 가족을 큰 슬픔에 빠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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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9세(Charles IX)

1560년 오빠 프랑수아 2세가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의 왕관은 10살밖에 되지 않은 샤를에게 넘어왔습니다. 카트린 드 메디치와 앙리 2세의 다섯째 자녀인 그에게는 그런 무거운 역할을 맡기엔 너무 어렸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 왕국의 통치권은 카트린 드 메디치에게 위임되었고, 그녀는 섭정 여왕이 됩니다.

샤를 9세가 직접 권력의 고삐를 쥔 것은 1570년, 이미 20세가 된 이후였습니다. 카트린의 자녀 중 둘째 아들인 그는 공부와 정무보다 사냥을 더 즐겼고, 이후 실책과 폭거를 거듭하게 됩니다.

특히 그는 1572년 8월 24일 프랑스 전역에서 약 3만 명에 달하는 개신교도가 학살당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승인한 인물로 기록됩니다. 건강이 허약했던 프랑스의 왕 샤를 9세는 이 비참한 사건들 이후 급격히 쇠약해져, 방생 성에서 며칠간 병상에 누워 지내다 24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1574년 5월 30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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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3세(Henri III)

카트린 드 메디치와 앙리 2세의 여섯째 자녀이자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국왕, 앙리 3세. 그러나 카트린이 가장 아끼던 이 아들은 '미뇽(mignons)'이라 불리는 총신들을 궁정에 들인 사건 이후 평판에 큰 상처를 입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앙리 3세를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는 괴벽하고 동성애적인 왕으로 기억하지만, 사실 그의 유명한 '미뇽'들은 군주에게 헌신했던 전우(戰友)들에 불과했다는 점을 짚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형 샤를 9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이 되기 전, 앙리는 먼저 폴란드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영광은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의 재능과 막대한 재정 지원 덕분이었는데, 아끼는 아들에게 화려한 미래를 보장하고 싶었던 그녀는 그가 훗날 프랑스의 왕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앙리 3세는 또한 궁정 예법을 처음 확립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이를 통해 모든 이들 위에 군림하는 왕의 위상을 세웠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종교 전쟁이 새로운 기세로 재점화되고 수많은 정치적 음모가 얽히면서, 앙리 3세는 파리에서 쫓겨난 뒤 결국 한 수도사의 암살을 당합니다. 카트린 드 메디치의 여섯째 자녀는 1589년 8월 2일, 3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친동생이 이미 요절한 상태였기에 그는 처남동생인 나바라의 앙리를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발루아 왕조의 막을 내리고, 부르봉 왕조의 시대를 여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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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드 프랑스(Marguerite de France), '마르고 왕비'

'마르고 왕비(Queen Margot)'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마르그리트 드 프랑스는 카트린 드 메디치와 앙리 2세의 셋째 자녀입니다. 1553년 5월 14일 생제르맹앙레 성에서 태어난 그녀는 오빠들 곁에서 신분에 걸맞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오빠 프랑수아 2세가 왕위에 오를 때 그녀는 겨우 6세였습니다. 오빠 샤를 9세가 왕관을 이어받은 뒤에도 마르그리트는 프랑스 궁정에 머물렀고, 바로 그곳에서 미래의 남편 나바라의 앙리—즉 왕위 계승 서열 1위이자 훗날의 앙리 4세—를 만나게 됩니다. 마르고 왕비와 나바라의 앙리의 결혼은 순전히 정치적인 목적의 결합이었습니다.

앙리가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이 혼인은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오랫동안 벌어져 온 분쟁을 화해시키기 위한 다리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결혼식은 1572년 8월 18일 거행되었지만, 이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나기 불과 6일 전이었습니다. 결국 이 결혼은 종교 전쟁의 참극을 막지 못했습니다.

1594년 2월 27일, 나바라의 앙리는 프랑스 왕위에 올라 역사에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앙리 4세가 되었고, 마르그리트 역시 프랑스의 왕비가 됩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축배와 달리 부부 관계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결혼 22년이 지난 뒤에도 마르고 왕비는 앙리 4세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고, 프랑스에 후계자도 없었습니다. 앙리 4세는 훗날 루이 13세의 어머니가 되는 마리 드 메디치와의 재혼을 위해 혼인 무효를 청원합니다. 카트린의 셋째 자녀는 오베르뉴로 추방되었다가 1605년에야 궁정으로 돌아옵니다. 원한을 내려놓은 그녀는 선황제의 죽음 이후 왕국의 섭정이 된 마리 드 메디치의 고문 역할을 맡으며 남은 생을 보냈고, 1615년 3월 26일 영면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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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드 프랑스(François de France)

카트린 드 메디치와 앙리 2세의 여덟째 자녀이자 마지막 아들인 프랑수아 드 프랑스는 1555년 3월 18일 퐁텐블로 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굳히기 위해 카트린과 앙리 2세는 아들 프랑수아를 훗날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배필로 내세웁니다.

그러나 혼담은 결국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이후 젊은 왕자는 정치 경력을 시작해 야당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며, 집안에서는 반항아 같은 동생 역할을 맡았습니다. 프랑수아 드 프랑스는 프랑스의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겨우 29세의 나이로 요절하며, 그 결과 왕조 교체라는 거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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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투아르 드 프랑스(Victoire de France)

프랑스 국왕에게 여덟 명의 자녀를 안겨준 뒤에도 카트린 드 메디치는 다시 임신을 합니다. 이번에는 쌍둥이였습니다. 먼저 태어난 아이가 바로 빅투아르 드 프랑스입니다. 고통스러운 분만과 두 번째 쌍둥이의 비극적인 운명 속에서, 빅투아르 역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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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드 프랑스(Jeanne de France)

카트린 드 메디치의 마지막 자녀인 잔 드 프랑스는 쌍둥이 언니 빅투아르에 이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산의들은 곧 막내아이가 사산(死産)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잔은 어머니 카트린의 자궁 속에서 자세가 좋지 않은 상태였고, 이로 인해 카트린 여왕 역시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몸과 마음 모두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이 고통스러운 출산 이후, 프랑스의 왕비는 더 이상 왕위 계승자를 낳지 않기로 결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