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덴의 페핀(Pépin de Landen, 580~640)은 프랑크 왕국 동부 지역인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e)의 대귀족으로, 메우스(Meuse) 강 유역에 걸친 광대한 영지를 보유한 인물이었다. 그는 후대에 '페핀 1세' 혹은 '노(老) 페핀'이라 불리며, 훗날 카롤링거 왕조로 이어지는 명문 가문의 시조격 인물로 평가받는다.
브륀힐드 여왕과의 대립
페핀은 메츠(Metz) 주교 아르눌프(Arnoulf)와 손을 잡고, 네우스트리아(Neustrie)의 국왕 클로타르 2세(Clotaire II)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아우스트라시아를 장악하고 있던 브륀힐드(Brunehaut) 여왕에게 맞섰다. 이러한 정치적 선택은 프랑크 왕국 전체를 통합하려던 클로타르 2세의 대업에 큰 힘을 실어 주었고, 페핀 역시 그 대가로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한층 더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두 명문 가문을 잇는 혼맥
페핀은 자신의 딸 베가(Begga)를 아르눌프 주교의 아들인 안세기셀(Ansegisèle)에게 시집보냈다. 바로 이 결혼을 통해 태어난 인물이 헤르스탈(Herstal)의 페핀으로, 그의 후손들은 나중에 샤를마뉴를 배출하는 카롤링거 왕조로 이어지게 된다. 즉, 페핀이 설계한 이 혼맥은 서유럽 중세사의 큰 흐름을 바꾸는 씨앗이 된 셈이다.
궁정 재상으로서의 삶
페핀은 어린 다고베르(Dagobert)의 고문 겸 후견인 역할을 맡았으나, 다고베르가 성년이 된 뒤에는 신임을 잃고 밀려나는 시련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정 재상(maire du palais) 자리에 올라 실질적인 통치 권한을 행사했으며, 다고베르 사후에는 어린 후계 군주의 섭정으로 정무에 복귀하기도 했다.
말년의 페핀은 평생 쌓아 온 권력과 지위를 아들 그리모알드(Grimoald)에게 물려주었다. 이로써 페핀 가문은 단순한 지방 귀족을 넘어 프랑크 왕국의 정치를 좌우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카롤링거 왕조 등장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