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파리 코뮌의 여성 지도자, 빅토린 고제(Victorine Gorget)

파리의 세탁부였던 빅토린 고제(Victorine Gorget, 1843~1901)는 파리 코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당시 지도자로 인정받은 인물입니다.

'위대한 빅토린'

빅토린 고제는 엘레오노르 코숑(Eléonore Cochon)과 에드메 고제(Edmet Gorget)의 딸로, 1843년 4월 20일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언론인 앙리 로슈포르(Henri Rochefort)는 훗날 저서 『나의 생애 모험』에서 유배지에서 만난 '위대한 빅토린'이 크레올 출신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녀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지만, 파리에서 거주하며 세탁부이자 빨래꾼으로 일했다는 사실 정도입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빅토린은 27세였으며, 특히 혹독했던 겨울 동안 프로이센군의 수도 포위전과 이어진 기근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습니다.

파리 코뮌의 여성 지도자, 빅토린 고제(Victorine Gorget)

포위전의 고통, 프랑스의 패배, 그리고 1871년 1월 체결된 휴전 협정은 당시 노동자들이 겪던 가혹한 노동 조건에서 비롯된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빅토린을 비롯한 많은 파리 시민들은 패배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전쟁의 계속을 원했습니다.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 정부가 파리 시민들이 자비로 구입한 대포를 징발하여 국민방위군을 무장 해제하려 하자 봉기가 일어났고, 정부는 베르사유로 피신했습니다. '파리 코뮌'이라 불리는 이 봉기는 두 달간 지속되었으며, 그 기간 동안 자치 정책이 시행되는 가운데 파리와 베르사유 사이에 수많은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파리 코뮌과 여성들의 참여

수많은 여성들이 이 실험과 봉기에 참여했습니다. 도시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정치·사회 토론 클럽에 모였고, 바리케이드에 섰으며, 일상생활의 운영에도 나섰습니다. 빅토린 고제 역시 여느 교회처럼 성 미셀 데 바티뇰(Saint-Michel-des-Batignolles) 교회 건물에 마련된 '사회 혁명 클럽'에 드나들었으며, 지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목소리를 높였고, 특히 봉기와 베르사유와의 투쟁 속에서 여성의 위상을 옹호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발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집니다.

"숙녀들은 무장을 갖추고 성벽을 지켜야 합니다. 신사분들이 베르사유 군대를 상대로 출격하는 동안에 말이지요."

코뮌 내 여성의 위상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따라, 빅토린은 '파리 방어와 부상자 간호를 위한 여성 연합' 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활동가 나탈리 르멜(Nathalie Lemel)과 엘리자베트 드미트리예프(Élisabeth Dmitrieff)가 설립한 이 페미니스트 단체는 전투 희생자들을 돌보는 데 헌신한 1천 명이 넘는 회원을 규합했습니다. 봉기 참여를 넘어 여성 연합은 노동 여성의 권익 보호와 경제적 해방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파리 코뮌은 1871년 5월 21일부터 28일까지의 '피의 일주일'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기간 동안 봉기는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수천 명이 살해당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이웃의 밀고로 빅토린은 1872년 3월 재판에 회부되어 "공공장소에서 행한 연설, 외침 또는 위협을 통한 내전 선동과 범죄 및 반란군 집결에 대한 교사"라는 죄목으로 유배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저는 진주를 꿰러 여기 온 게 아니에요"

빅토린 고제는 1873년 8월, 4개월에 걸친 항해 끝에 뉴칼레도니아로 향하는 범선에 올랐습니다. 나탈리 르멜,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 그리고 논객이자 언론인인 앙리 로슈포르도 같은 배에 탑승했습니다. 로슈포르는 『나의 생애 모험』에서 '위대한 빅토린'에 대해 몇 줄을 할애했습니다.

"22명의 불행한 사람들 가운데, 온몸으로 그들을 압도하는 젊고 키 큰 여인이 있었다. 검고 짧은 머리에 호박색 눈동자, 갈색 피부를 지녔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위대한 빅토린'이라 불렀다.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크레올 출신이었다. 그녀는 우리처럼 새장 안을 표범처럼 활보했고, 보기에도 남자 못지않게 용감하게 싸운 모양이었다. 여성 구역을 담당하던 두 수녀가 그녀의 위풍에 겁먹자 그녀는 말했다. '아! 자매님들, 제발 믿어 주세요. 저는 진주를 꿰러 여기 온 게 아니에요. 저는 베르사유의 그 무법천지 놈들에게 샤스포 소총을 한 번씩 날려 주었답니다!' 훌륭한 인물이었고, 동료 수용자들을 돌보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세심했다. 며칠 뒤에는 배의 장교 중 하나가 그녀를 결코 무관심하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배 이후 빅토린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습니다. 누메아에서 세탁부로 일했고, 이후에는 목욕장 관리인으로 일했습니다. 1875년에는 듀코(Ducos) 반도의 감옥에서 몇 달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군인 장바티스트 조제프 퓌상(Jean-Baptiste Joseph Puissant)과 사실혼 관계에 있다는 혐의를 받았고, 같은 해 12월 그와 결혼했습니다.

1878년 빅토린은 감형을 받았고, 다음 해에는 거주 의무가 해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파리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1891년 파페테(Papeete)에서 재혼했으며, 1901년 10월 누메아에서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