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출신 부모의 딸로 태어나 성공한 기업가가 된 마담 C.J. 워커. 고아가 되고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는 시련을 견뎌낸 그녀의 인생은 미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자수성가 스토리 중 하나로 꼽힙니다.
짧았던 유년기

훗날 마담 C.J. 워커로 알려지게 될 새라 브리들러브(Sarah Breedlove)는 1867년 12월 23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델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미네르바와 오언 앤더슨 부부의 다섯째 아이였던 그녀는 가족 중 최초로 자유민으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노예 출신이었던 그녀의 부모는 노예제가 완전히 폐지되기 불과 2년 전까지 한 부유한 농장주의 면화밭에서 혹사당했습니다. 자유를 얻었지만 극도로 가난했던 부부는 이후 면화밭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새라에게 인생은 짧은 유년기만을 허락했습니다. 그녀는 매우 어린 나이부터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다섯 살 때 이미 가족과 함께 면화밭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1872년 어머니 미네르바가 콜레라로 추정되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재혼한 아버지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면서 새라는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미시시피주 빅스버그로 내려가 언니 루베니아와 그의 남편 제시 파월 밑에서 지내며 하녀로 일했습니다.
"나는 인생을 시작할 때 거의 아무런 기회도 없었다. 일곱 살에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고아가 되었으니까."
스무 살의 젊은 과부
새라의 형부 제시는 잔인한 남자였고, 그를 피하기 위해 새라는 열네 살에 노동자 모세 맥윌리엄스와 결혼합니다. 두 사람은 2년 후 딸 리일리아(훗날의 A'Lelia 워커)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4년 후 세상을 떠났고, 새라는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어린 딸을 홀로 키워야 하는 과부가 되었습니다. 거듭된 시련 속에서도 새라는 평생을 관통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딸과 함께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해 형제 알렉산더, 제임스, 솔로몬과 합류했고, 세탁부로 일하며 고된 노동에도 적은 돈을 벌었습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새라는 세인트 폴 감리교회에 다니며 지역 흑인 공동체, 특히 부르주아 계층과 교류했습니다. 자신이 누리지 못한 교육을 딸에게는 꼭 주고 싶었던 그녀는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야간 수업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894년 존 데이비스와 재혼했지만 1903년에 그와 헤어졌습니다.
헤어케어 사업의 시작
당시 많은 여성들처럼 새라도 모발과 피부 문제로 고생했습니다. 열악한 영양 상태, 상수도 부재로 인한 위생 관리의 어려움, 각종 질병, 자극적인 위생용품 사용 등 여러 요인이 비듬과 탈모 같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새라는 이발사가 된 형제들에게서 헤어케어 기술을 배웠습니다. 이후 아프리카계 미국인 기업가 애니 말론의 회사에서 일하며 흑인 여성용 헤어케어 제품을 판매했습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만의 제품을 연구해 탈모를 막고 모발 재성장을 촉진하는 치료법을 개발했습니다.
20세가 된 딸 A'Lelia와 함께 콜로라도주 덴버로 이주한 새라는 자신만의 헤어케어 라인과 사업을 키워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스승이자 경쟁자가 된 애니 말론과 갈등을 빚게 되는데, 말론은 그녀가 자신의 제조법을 훔쳤다고 비난했습니다.
'마담'의 탄생

1906년 새라는 언론인 찰스 워커와 결혼했습니다. 6년 후 이혼했지만 그녀와 딸은 그의 성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녀는 '마담 C.J. 워커(Madam C.J. Walker)'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마담'이라는 호칭은 프랑스의 미용 산업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녀의 회사 이름도 Madam C.J. Walker Manufacturing Company(마담 C.J. 워커 제조회사)가 되었습니다.
마담 C.J. 워커는 처음에 남편의 홍보 조언을 받으며 방문 판매로 제품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사업이 점점 전문화되고 성공을 거두면서, 그녀는 제품 판매를 딸에게 맡기고 자신은 미국 전역을 돌며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1908년에는 남편과 함께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로 이주해 미용실과 미용 학교를 열었습니다.
그녀는 제품 판매를 위해 흑인 여성들을 공인 판매원으로 모집하고 교육했습니다. 사업을 키우는 동시에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열어준 것입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수천 명의 여성들이 마담 C.J. 워커 컴퍼니의 흑백 유니폼을 입고 제품을 판매했고, 1917년에는 회사가 약 2만 명의 여성을 교육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사회에 헌신한 기업인
1910년 마담 C.J. 워커는 회사 본사를 인디애나폴리스로 옮겨 공장, 미용실, 학교, 실험실을 설립했습니다. 끊임없이 성장하는 회사를 운영할 팀을 꾸리고 많은 여성을 핵심 직책에 앉혔습니다. 부와 명성이 쌓이면서 그녀는 정치적 견해를 더욱 적극적으로 표명했고, 특히 기부를 통해 여성 권익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권리라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대의를 지원했습니다.
자신은 교육받을 기회가 없었지만 딸에게는 교육을 받게 해준 그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위한 학교, 대학, 연구소에 기부했습니다. 1917년에는 전미 유색인종 지위 향상 협회(NAACP) 뉴욕 지부의 집행위원회에 합류해 기부를 이어갔으며, 저명한 노예제 반대 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저택 보존에도 재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1919년에는 NAACP의 린칭 반대 캠페인을 위해 5,000달러(2019년 화폐 가치로 약 78,000달러 상당)를 기부했습니다. 사실 그녀는 2년 전에도 민권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백악관을 찾아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린칭을 막는 법안 제정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인 바 있습니다. 그녀는 고아원에도 기부했으며, 메리 매클라우드 베슌, W. E. B. 듀보이스 같은 활동가들과 가깝게 지내며 강연 활동도 펼쳤습니다.
마담 C.J. 워커는 1919년 5월,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재산은 50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 사이로 추정되며, 이는 그녀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2년 전인 1917년에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아직 백만장자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되기를 바란다. 돈을 내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선한 일을 위해서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딸 A'Lelia 워커가 Madam C.J. Walker Manufacturing Company의 경영을 물려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