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주의 활동가였던 엘리자베스 드미트리에프(1851~1910 또는 1918)는 파리 코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는 나탈리 르멜과 함께 여성연합(Union des femmes)을 공동 설립했다.
변방의 귀족, 어린 시절

엘리자베타 루키니치나 쿠셸레바라는 본명으로 1851년 11월 1일, 러시아 제국 북서부의 볼로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카 쿠셸레프는 전직 장교이자 귀족 지주였고, 어머니 나탈리아-카롤리나 도로테아 트로스트키예비치는 간호사였다. 부모가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난 그녀와 다섯 명의 형제자매는 사생아로 간주되어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소외되었으며, 아버지의 작위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지위와 재산 덕분에 그녀는 가정교사로부터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장서가 풍부한 도서관을 이용하며 여러 언어를 익힐 수 있었다. 이러한 이론적 교육과 더불어, 아버지가 타 지주들과 함께 농노들에게 가혹한 노동 조건을 강요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이 경험은 그녀에게 사회적 불평등과 계급 투쟁의 현실을 각인시켰고, 농노 해방뿐만 아니라 여성 해방에 헌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독학으로 칼 마르크스의 저작을 잡지에서 접하고,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으며 자유로운 여성의 삶을 꿈꾸게 되었다. 해방과 더 높은 교육에 대한 갈망은 그녀를 가족으로부터 떠나게 했다. 1868년, 위장 결혼을 통해 상속 재산의 일부를 챙겨 혁명 단체에 기부한 뒤 스위스로 떠났다.
제네바와 런던에서의 활동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회주의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엘리자베스 드미트리에프는 1868년 제네바에 정착한 후에도 활발히 움직였다. 그곳에서 러시아 망명 혁명가들과 다양한 국적의 사회주의자들, 특히 프랑스인들을 만났다. 신문 민중의 대의(La Cause du Peuple) 발행을 공동 주도하고,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 러시아 지부에서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다. 1870년, 인터내셔널은 그녀를 런던으로 파견해 칼 마르크스를 만나게 했다. 그녀는 그해 말 런던에 도착해 석 달간 마르크스와 정치적 견해를 나누며 민중의 대의 사본을 전달했다.
같은 시기 파리에서는 1870년 보불전쟁의 패배, 독일군의 혹독한 파리 포위, 1871년 1월의 휴전 협정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3월, 포위와 기아를 견딘 파리 시민들이 전쟁을 지속하려 하자, 아돌프 티에르 정부는 국민위대 해산을 시도했다. 이에 시민과 국민위대가 봉기하며 파리 코뮌이 시작되었다.
파리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던 칼 마르크스는 그녀를 인터내셔널 총위원회 대표로 파리에 파견했다. 그녀는 봉기 열흘 뒤인 3월 28일, 코뮌 의회 의원 선거 이틀 후에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 코뮌에서의 활약
초기에 '엘리즈 드미트리에프'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며 마르크스에게 현황을 보고하던 그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제네바에서 알던 러시아·프랑스 사회주의자들, 특히 소피아 코발렙스카야와 안나 자클라르 자매가 코뮌에 참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곧 그녀는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로 코뮌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코뮌은 자치에 가까운 정책을 펼치며 노동자, 외국인, 여성을 위한 수많은 사회 개혁을 단행했다.
4월 11일, 그녀는 파리 시민에게 고함에 서명해 여성들에게 베르사유 정부군과의 전투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 "파리 시민 여러분, 대혁명 여성들의 후예여, 우리는 형제들을 지키고 복수할 것입니다." 이 호소에 따라 나탈리 르멜과 함께 '파리 방위와 부상자 구호를 위한 여성연합'을 공동 설립했으며, 천 명 이상의 회원이 전투 피해자를 돌보는 데 헌신했다.
운동가로서의 풍부한 경험을 살려 여성연합의 위계적 구조와 정치적 조직을 총괄했고, 여성 해방과 여성 노동자 권리 실현을 위해 섬유업 협동조합 작업장을 설립했다.
피의 주간
약 두 달간 지속된 파리 코뮌은 1871년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피의 주간'이라 불리는 잔혹한 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5월 22일, 여성연합은 여성들을 전투에 소집했다. 엘리자베스 드미트리에프는 여성들만으로 바리케이드를 구축한 블랑슈 광장으로 여성을 이끌었고, 나탈리 르멜은 피갈 광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직접 전투에 참여해 부상자를 치료하고, 병참 지원, 급식, 구호반 운영 등을 총괄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세는 빠르게 혁명파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수천 명이 학살되고 수만 명이 체포되었다. 바리케이드에서 부상을 입은 그녀는 헝가리 출신 활동가 레오 프랑켈과 함께 도주하며 학살과 재판을 피했다. 두 사람은 제네바에 정착했고, 그녀는 수배를 피하기 위해 '옐리자베타 토마노프스카야'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마르크스가 코뮌을 충분히 지지하지 않았다고 여겨 그와의 연락을 끊었다.
10월, 그녀는 궐석재판에서 추방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의 송환 요구가 거세지자 스위스는 이를 거부했지만, 압박이 심해지자 그녀는 10월 러시아로 귀국했다.
이반 다비도프스키와의 인연
러시아로 돌아온 그녀는 큰 실망을 맛보았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정국이 반동적으로 변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혁명적 사회주의 모임은 자취를 감췄다. 특히 그녀가 중요하게 여겼던 여성 권리 문제는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가족에게 돌아온 그녀는 남편의 청지기였던 이반 다비도프스키와 관계를 맺어 두 딸을 두었다. 특권층 출신인 이반은 '하트 잭단'이라는 사기단을 이끌며 부유층을 갈취하는 방식으로 불평등에 맞섰다.
1873년 전남편이 사망한 뒤, 그녀는 두 딸 이리나와 베라의 교육에 전념했다. 1876년 이반이 판사 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유형형을 선고받자, 그를 따라 시베리아로 가기 위해 정식으로 혼인했다.
유형 생활과 말년
시베리아 남부 아친스크에서 제과점을 열었으나, 이반이 정치범이 아닌 일반 범죄자라는 이유로 정치범들의 보이콧을 받아 파산했다. 남편의 악평으로 그녀 역시 수감자 사회에 융화되지 못했고, 다시 딸들의 교육에 몰두했다.
1900~1902년 사이 남편을 떠나 두 딸과 모스크바로 이주해 재봉사로 생계를 이었다. 그녀의 최후는 확실하지 않다. 1910년 사망설과 이혼설이 엇갈리며, 이혼 후 1918년까지 두 딸과 모스크바에서 빈곤하게 살았다는 주장도 있다. 어찌 되었건 엘리자베스 드미트리에프는 파리 코뮌의 주요 주역 중 한 명으로 역사에 남았다.
참고 자료
- 엘리자베스 드미트리에프 위키피디아 페이지
- 엘리자베스 드미트리에프, 파리 코뮌 여성들의 또 다른 지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