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희에서 군주로 — 라 베굼 삼루(La Begum Samru, 1750~1836)는 인도 사르다나(Sardhana) 공국을 58년간 다스렸습니다. 총명함과 뛰어난 수완을 갖춘 그녀는 무장 세력과 열강 사이에서 공국의 독립을 끝까지 지켜낸 인물입니다.
델리의 젊은 무희
파르자나 칸키(Farzana Khanqui)는 1750년경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 지방의 코타나(Kotana)에서 귀족 아사드 칸(Asad Khan)과 자단 바이(Jaddan Bai)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영국 제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어 가던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성장했습니다. 열 살 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은 파르자나와 어머니를 집에서 내쫓았고 모녀는 델리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녀는 당시 무희와 기생들이 모이는 곳으로 이름 높았고 영국인들이 갈수록 많이 찾던 차우리 바자르(Chauri Bazaar)의 한 집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파르자나는 이곳에서 춤의 기예를 익혔고, 바라트푸르 라자(Raja of Bharatpur)를 섬기던 45세 장수 월터 라인하르트(Walter Reinhardt), 통칭 ‘솜브르(Sombre)’를 만났습니다. 그는 첩이며 자신의 아들을 낳은 여인을 떠나, 당시 열네 살뿐이고 자신보다 서른 살 넘게 어린 소녀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사르다나의 자기르(jaghir)
용병이었던 월터는 여러 귀족 밑을 전전하다 마침내 무굴 황제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총명하고 용감하며 사람을 대하는 데도 능란했던 파르자나는 연인의 곁에서 함께 일했고, 전장에서도 그와 나란히 싸웠습니다. 월터의 군사적 공적은 1776년 부유한 사르다나 자기르(jaghir, 영지)를 하사받는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이로써 두 사람은 방랑하는 모험가에서 통치자로 탈바꿈했습니다. 파르자나는 신분 있는 여인에게 붙이는 경칭 ‘베굼(Begum)’을 얻어 ‘베굼 삼루’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년 뒤 월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칙대로라면 그의 아들 자파랴브 칸(Zafaryab Khan)이 자기르를 물려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파르자나에게는 남편의 부대의 지지가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그녀의 지략과 용기를 존경했습니다. 여기에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Shah Alam II)의 궁정에서의 영향력까지 더해지면서, 그녀는 사르다나를 손에 넣습니다. 대신 그녀는 남편의 아들에게 델리에서 호화롭게 생활할 재산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여인의 보석’, 제브 울니사(Zeb ul-nisa)
베굼 삼루는 사르다나 궁정과 남편이 남긴 약 4천 명의 병사를 장악하며 군주이자 군벌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작은 체구였지만 그녀는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아가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녀는 여러 차례 무력과 외교로 샤 알람 2세를 구했습니다. 1783년에는 협상과 은혜를 통해 바겔 싱(Baghel Singh) 장군이 이끄는 포위 공격을 막아냈고, 1788년에는 황제의 가신 굴람 카디르(Ghulam Qadir)에게서 황제를 구하기 위해 직접 군사 개입에 나섰습니다. 샤 알람 2세는 그녀를 ‘사랑하는 딸’이라 불렀으며, ‘여인의 보석’이라는 뜻의 제브 울니사(Zeb ul-nisa) 칭호를 하사했습니다.
1791년 파르자나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요안나(Joanna)라는 세례명을 받았는데, 이는 그녀가 들은 이야기 속 인물 잔다르크(Joan of Arc)를 본떴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무굴식 의복과 풍습, 궁정 예법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번영하는 공국
베굼 삼루의 궁정에는 여러 유럽 출신 장교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중 프랑스인 피에르 앙투안 르바술(Pierre Antoine Le Vassoult) 대위와의 사이에서 연정이 싹텄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두 사람은 도피를 시도했지만, 도중에 피에르 앙투안은 자살했고 파르자나도 절규의 몸짓이었는지, 아니면 함께 죽자는 약속이었는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상황 속에서 부상을 입습니다. 반란군에게서 그녀를 구출하고 권력을 되돌려준 것은 또 다른 부하 장교, 아일랜드인 조지 토머스(George Thomas)였습니다.
영국의 인도 식민화는 점차 가속화되었습니다. 마라타 제국(Maratha Empire)이 영국의 위협에 처하자, 무굴 제국에 대한 충성 의무 때문에 파르자나는 대대를 파견해야 했습니다. 전투는 참패로 끝났고, 이 패배는 영국의 인도 진출을 확고히 하며 베굼에게 항복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공후들과 달리, 파르자나는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공국을 계속 다스릴 수 있다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베굼은 공국의 발전에 헌신했습니다. 뛰어난 통치자였던 그녀는 왕국의 내정을 효과적으로 관리해 번영을 이끌었고, 예술과 문화를 진흥했으며 교회와 사제관을 세웠습니다. 한 방문객은 이렇게 평했습니다. “그녀의 밭은 더 푸르고 무성해 보이며, 그녀의 마을 사람들은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령의 주민들보다 더 행복하고 번영해 보인다.”
베굼 삼루는 58년의 통치를 마무리하며 1836년 1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