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우스트리아의 왕비, 킬페리크 1세의 아내인 프레데곤다(Frédégonde, 545년경~597년)는 남편과 함께, 그리고 남편 사후에는 홀로 권력을 행사하며 당대 정치의 핵심 인물로 군림했다. 야심가였던 그녀는 잔혹하고 권력에 굶주린 왕비로 기억되며, 특히 왕비 브루네하우트(Brunhaut)와의 치열한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다.
[주의: 성폭력 관련 내용 포함]

프랑크 왕국의 분열
프레데곤다의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으나, 545년경 메로빙거 왕조 초창기, 클로비스의 아들인 클로타르 1세(Clotaire Ier)가 통치하던 프랑크 왕국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우아즈(Oise)주의 앙지쿠르(Angicourt)에서 농노 집안의 딸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그녀가 열다섯 살쯤 되던 561년, 클로타르 1세가 60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다. 선대와 마찬가지로 왕국은 네 아들에게 제비뽑기로 분할 상속되었다.

- 카리베르트(Caribert): 솜 강과 피레네 산맥 사이, 파리 분지를 포함한 영토
- 킬페리크(Chilpéric): 북부 수아송(Soissons) 왕국
- 군트람(Gontran): 구 부르고뉴 왕국
- 시게베르트(Sigebert): 랭스(Reims) 왕국
몇 년 뒤 카리베르트가 후사 없이 죽자, 형제들 사이에 치열한 다툼 끝에 메로빙거 왕국의 경계가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 네우스트리아(Neustria), 부르고뉴(Burgundy)로 재편되었다.
시녀에서 왕비로
프레데곤다는 네우스트리아를 다스리던 킬페리크의 왕비 아우도베르(Audovère)의 시녀로 궁정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곧 왕의 눈에 들어 총애하는 정부가 되었다. 8세기 익명의 사료 프랑크인의 역사(Liber historiæ Francorum)에 따르면, 프레데곤다는 아우도베르를 속여 다섯째 딸 칠데신데(Childesinde)의 대모가 되게 했고, '자신의 딸 대모가 된 여인과 동침할 수 없다'는 근친상간 금기를 이용해 왕비 자리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진위 여부는 불확실하나, 아우도베르가 폐위된 것은 사실이다.
565년경, 킬페리크의 동생 시게베르트가 서고트 공주 브루네하우트와 결혼했다. 이 동맹은 킬페리크의 영토를 위협했고, 브루네하우트 아버지의 중립을 확보하고자 킬페리크는 브루네하우트의 언니 갈스빈트(Galswinthe)와 정략결혼을 강행했다. 아리우스파 신자였던 갈스빈트는 결혼을 두려워했고, 개종을 강요당했다.
부부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킬페리크는 정부들, 특히 프레데곤다를 계속 찾았다. 567년 갈스빈트와 브루네하우트의 아버지가 죽자 정치적 실익이 사라진 킬페리크는, 지참금을 잃지 않으려 이혼하지 않은 채 갈스빈트를 하인을 시켜 살해했다. 며칠 뒤 프레데곤다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왕가의 피의 복수(Faide Royale)
여동생의 잔혹한 살해는 브루네하우트를 격분시켰고, 영토 분할로 인한 긴장은 폭발했다. 중재를 위해 셋째 형 군트람이 재판관으로 나섰다. 부르고뉴 왕은 킬페리크를 폐위하지 않는 대신, 갈스빈트의 지참금으로 받은 도시들(남편 사후 아내가 갖는 재산)을 브루네하우트에게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킬페리크는 일단 수용하는 척했으나, 572년 아들 클로비스를 보내 투르(Tours)와 푸아티에(Poitiers)를 탈취했다. 시게베르트가 반격하며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 사이의 '왕가의 피의 복수(전통적 복수전)'가 584년까지 지속되었다.
수년간의 공방 끝에 시게베르트가 반격에 성공해 킬페리크를 투르네(Tournai)로 몰아넣었다. 시게베르트는 적군의 추대까지 받으며 네우스트리아 왕으로 인정받았으나, 575년 12월 대관식을 앞두고 프레데곤다가 보낸 시종들에게 암살당했다.
전세가 역전되어 킬페리크가 우위에 섰다. 그는 파리를 점령하고 브루네하우트를 투옥했으나, 다섯 살 난 아들 힐데베르트 2세(Childebert II)는 피신시켰다. 이듬해 브루네하우트는 탈출해 어린 아들의 섭정이 되었다.
정치적 숙청과 비극
프레데곤다는 여섯 자녀를 낳았으나 대부분 요절했다. 삼손, 다고베르트, 클로데베르트, 티에리(575~582년생) 모두 다섯 살 전후로 죽었다. 그녀는 가문의 계승을 위해 킬페리크와 아우도베르 사이의 자녀들을 제거했다. 티베르트는 전쟁 중 사망했고, 메로베는 아버지 명령으로, 클로비스는 프레데곤다의 지시로 추정되는 암살을 당했다. 딸 바진(Basine)은 프레데곤다가 보낸 남성들에게 강간당해 '명예를 더럽혀' 상속권을 잃게 한 뒤 수도원으로 보냈다.
584년, 프레데곤다는 여섯째 아들 클로타르(Clotaire)를 낳았다. 같은 해 킬페리크가 사냥에서 돌아오다 암살당했다. 범인은 도주해 배후를 밝히지 못했고, 사가들은 브루네하우트나 프레데곤다(남편의 불륜을 숨기려)를 지목한다. 이 죽음은 지지 기반을 잃은 프레데곤다를 위기로 몰았다.
군트람의 섭정
킬페리크의 죽음은 혼란을 불렀다. 귀족들이 왕의 보물과 문서를 챙겨 네우스트리아로 도망치고, 프레데곤다의 지지자들도 등을 돌렸다. 장녀 리공드(Rigonde)와 서고트 왕의 혼담도 파기되었다. 곳곳에서 산발적 충돌이 일어났다.
후계자 보호를 위해 프레데곤다는 아들 넷을 모두 일찍 잃은 시숙 군트람에게 아들 입양을 요청했다. 브루네하우트는 시게베르트 암살의 대가로 프레데곤다를 넘기라 요구했으나 군트람은 거절했다. 네우스트리아 귀족 회의가 프레데곤다의 아들을 적통 후계자로 인정하고, 군트람이 양자로 들이며 섭정이 되었다. 질서가 회복되자 프레데곤다는 루앙(Rouen) 교구, 프레텍타투스(Prétextat) 주교의 감시 아래 놓였다.
프레데곤다의 권력 복귀
감시를 벗어나려던 프레데곤다는 586년 부활절, 프레텍타투스 주교가 미사 도중 제단 앞에서 농노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농노는 프레데곤다와 정적들에게 매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의 몸이 된 그녀는 아들과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동맹을 구축했다. 이에 군트람은 네우스트리아 귀족과 손잡고 브루네하우트, 힐데베르트 2세와 접근해 '두 왕 중 생존자가 상대방 영토를 상속한다'는 조약을 맺었다. 592년 군트람 사후 힐데베르트 2세가 아우스트라시아와 부르고뉴 왕이 되었고, 브루네하우트가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다.
프레데곤다가 이끄는 네우스트리아와 힐데베르트 2세의 아우스트라시아·부르고뉴 연합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에게 점차 상징적·군사적 역할을 맡겼다. 593년, 아홉 살 난 클로타르가 아우스트라시아 공작과 싸우는 군대의 선두에 섰다. 597년, 52세로 생을 마감한 프레데곤다는 아들에게 단독 통치권을 물려주었다.
역사적 평가
그레고리우스 투르넨시스(Gregory of Tours) 등 당대 사가들은 프레데곤다를 '악녀'로 묘사했으나, 현대 사학은 그녀를 혼란기 메로빙거 왕조에서 생존과 권력 유지를 위해 냉철하게 대처한 여성 통치자로 재평가한다. 농노 출신으로 왕비가 되어 두 왕국의 섭정을 거치고, 아들 클로타르 2세를 통해 프랑크 왕국 재통일의 기반을 닦은 그녀의 삶은 중세 초기 여성 권력의 드문 사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