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신분에서 프랑크족의 여왕이 된 바틸데(약 630~680)는 왕국의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훗날에는 섭정으로서 국정을 직접 다스렸습니다. 그녀는 평화 유지에 힘썼으며, 자신의 영지에서 노예 매매를 금지하는 등 시대를 앞선 개혁을 단행한 인물입니다.
어린 나이에 팔려온 노예
바틸데의 삶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료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익명의 저자가 집필한 성인전 《성 바틸데 전(Vita sanctæ Bathildis)》입니다. 이후 여러 차례 편집된 판본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기》에 따르면 바틸데는 당시 아직 '갈리아'라 불리던 땅에 "값싸게 팔린" 노예로 도착했습니다. 그녀는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색슨족 출신으로 추정되며, 미천한 가문 출신인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후대에 편찬된 판본들은 오히려 귀족, 심지어 왕가의 혈통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 귀부인은 작센에서 왔으며 왕가의 핏줄이었다. 어린 시절 불경한 무리들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이처럼 과장된 가설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하녀에서 여왕으로
바틸데는 프랑크 왕국 네우스트리아의 궁재상 에르키노알드에게 팔렸습니다. 궁재상은 국왕 다음가는 최고위 관직으로, 당시 프랑크 왕국의 정치에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에르키노알드는 아직 십대였던 바틸데를 자신의 하녀로 삼았는데, 《전기》는 그녀가 방 안에서 그에게 술을 따랐다고 기록해, 그녀가 가문 안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음을 보여줍니다. 문헌들은 그녀를 겸손하고 경건하며 자애롭고, 아름답고 우아한 인물로 묘사합니다.
아내가 죽자 에르키노알드는 바틸데와 재혼하려 했지만, 그녀는 몸을 피해 숨었고 결국 그는 다른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이후 에르키노알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하녀였던 바틸데를 젊은 프랑크 국왕 클로비스 2세, 즉 다고베르 1세의 아들에게 헌상했습니다. 649년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의 결혼은 전직 노예였던 바틸데를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비로 만들었습니다. 이 결합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 중에는 훗날 왕이 되는 클로타르 3세, 힐데리크 2세, 티에리 3세가 있었습니다.
여왕이자 섭정
《프레데가르 연대기》는 바틸데를 현명하고 교양 있는 여왕으로 묘사합니다. 그녀는 교회를 지원하고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전기》에 따르면 그녀는 사제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굶주린 자들에게 먹일을 주며, 벌거벗은 이들에게 옷을 입혔고, 교회에 막대한 금액을 기부했으며 수도원들을 세웠습니다. 또한 자신의 사제(샤펠레인)였던 리옹의 제네(훗날 주교가 됨)를 비롯해 크로도베르 주교, 성 오앙, 성 엘루아 같은 성직자들을 고문으로 삼았습니다.
클로비스 2세는 657년에 사망했습니다. 장남 클로타르는 겨우 다섯 살이었고, 바틸데는 왕국을 자녀들에게 나누지 않기 위해 홀로 섭정을 맡았습니다. 한편 오스트라시아에서는 '입양왕' 힐데베르트의 통치가 왕국의 일부 귀족들에게 도전받고 있었습니다. 프랑크 왕국(Regnum Francorum)의 통일을 지키기 위해 바틸데는 둘째 아들 힐데리크를 오스트라시아 왕위에 올렸습니다. 그때 그는 겨우 여덟 살이었으며, 궁재상 울포알드의 후견 아래 통치했습니다. 《전기》는 여왕이 왕국의 평화와 통일에 끼친 영향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세 왕국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틸데 부인의 깊은 경건함과 하나님의 뜻 덕분이라 믿습니다."
노예 제도와의 싸움
노예 출신 여왕인 바틸데는 교회가 비난하던 노예 제도 철폐를 위해 힘썼습니다. 그녀는 프랑크 왕국 영토 내에서 기독교 노예의 매매를 금지했고, 스스로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해 그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거나 수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바틸데는 가구의 인원수에 비례해 부과되는 세금 원칙에도 반대했습니다. 이 규칙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세금을 낼 수 없어 갓난아기가 방치되어 죽기도 했고, 가장들은 빚 때문에 감옥에 갇혀 가족의 생계가 끊기곤 했습니다. 바틸데는 이렇게 갇힌 많은 납세자들을 석방시켰습니다.
교회와 그 규율을 깊이 존중하던 여왕은 마지막으로 성직매매, 즉 재물과 성사, 성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서도 노력했습니다.
성녀 바틸데
바틸데의 마지막 정치 활동으로 알려진 것은 664년, 그녀가 최근에 설립한 코르비 수도원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녀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권력에서 물러났지만, 아마도 극도로 폭력적인 정치 상황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녀의 참모 중 한 명이었던 파리 주교 지그브랑은 665년경 암살당했습니다.
바틸데는 남편 사후 자신이 세운 셸 수도원으로 은퇴했습니다. 노예에서 여왕이 되었던 그녀는 이제, 자신이 직접 수도원장으로 임명했던 베르틸 아래서 한낱 수녀로 살아갔습니다. 수도원과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보낸 말년 끝에 그녀는 680년 혹은 681년 1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틸데를 기리는 공경은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그 중심에는 카롤링거 왕조의 공주들이 수도원장을 맡던 셸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11세기 교황 니콜라오 2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