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은 타고난 재능을 지닌 프랑스의 조각가로, 19세기 말을 대표하는 중요한 예술가 중 한 명입니다.
조각을 배우다
카미유 클로델은 1864년 12월 8일, 루이즈아트나이즈 클로델(Louise-Athanaïse Claudel)과 루이프로스페르 비엔 클로델(Louis-Prosper Vivenne Claudel) 부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남동생 폴 클로델(Paul Claudel)은 시인이자 극작가, 외교관으로 성장하여 훗날 프랑스 아카데미(French Academy) 회원이 되는 인물입니다.
청소년기에 클로델 가족은 몇 년간 노장쉬르센(Nogent-sur-Seine)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카미유는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Alfred Boucher)를 만나 조각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조각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카미유는 흙으로 작업을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이를 적극 지지했지만 어머니는 그런 예술 활동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1882년, 카미유는 가족을 설득해 파리로 이주시키고, 알프레드 부셰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등 거장들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기법을 갈고닦았습니다. 그녀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생루이 섬(Île-Saint-Louis)에 공방을 임대해 창작 활동에 몰두했습니다.
오귀스트 로댕과의 만남
오귀스트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 사이에는 즉각 깊은 예술적 교감이 형성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로댕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금이 묻힌 곳을 가르쳤을 뿐, 그녀가 캐낸 금은 전적으로 그녀 자신의 것이다." 그녀의 예술은 독창적이고 새롭고 친밀한 분위기를 지녔으며, 카미유는 끝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냈습니다.
두 조각가는 열정적이면서도 격동적인 사랑 관계를 이어갔지만, 카미유는 단지 '로댕의 제자'로만 취급되는 것을 거부하고 결국 그를 떠나기로 합니다. 약 10년간 그녀는 왕성하게 작품을 남겼지만, 당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체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져 국가로부터 의뢰를 받지 못했고, 카미유는 극심한 궁핍 속에 살아가야 했습니다.
30년의 수용소 생활
고독 속으로 스스로를 닫아버린 카미유 클로델은 점차 정신적 균형을 잃어갔고, 191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가족의 결정에 따라 빌레브라르(Ville-Évrard) 요양원에 강제 입소됩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방문 한 번 받지 못한 채 무려 30년을 보내야 했으며, 유일하게 남동생 폴만이 몇 차례 면회하러 왔을 뿐입니다.
요양원에서의 생활은 그녀에게 행복하지 않았고, 카미유는 조각 작업마저 접게 됩니다. 그녀는 여러 차례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 열악한 수용 조건을 호소했습니다. 그녀의 애호가들과 오귀스트 로댕은 이러한 감금에 분개했으며, 언론은 이를 '교권에 의한 범죄'라 규정하고 특히 가족이 그녀를 없애려 한다는 비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로댕 역시 그녀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1943년, 카미유 클로델은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은 요양원에서의 영양실조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9세기 말의 중요한 예술가로 평가받는 그녀는 약 50점의 조각 작품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카미유 클로델, 『파도(The Wave)』, 1897 – © Lomita

카미유 클로델, 『색운탈라(Sakountala)』, 대리석 조각, 1905

카미유 클로델, 『왈츠(The Waltz)』

카미유 클로델, 『성숙기(The Mature Age)』, 1899 – © Thibs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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