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우오칼라니(Liliʻuokalani, 1838~1917)는 리디아 카마카에하 파키(Lydia Kamakaʻeha Paki)라고도 불리며,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군주였습니다.
왕족의 혈통으로 태어나다
릴리우오칼라니는 1838년 9월 2일, 하와이 제도의 주요 섬 중 하나인 카우아이섬의 족장이었던 애니 케오히칼로레(Annie Keohokālole)와 시저 칼루아이쿠 카파아케아(Caesar Kaluaiku Kapaʻakea)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와이 전통의 '하나이(hānai)' 양육 관습에 따라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초대 하와이 국왕 카메하메하 1세의 손녀인 로라 카나홀로 코니아 파울리(Laura Kanaholo Kōnia Pauli)에게 입양되었습니다. 그녀는 양가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자랐으며, 학교에 다니며 특히 영어를 배웠습니다.
1862년 9월 16일, 릴리우오칼라니는 훗날 오아후와 마우이 섬의 총독이 되는 존 오언 도미니스(John Owen Dominis)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이 결혼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은 여러 차례 바람을 피웠고, 릴리우오칼라니는 자녀를 낳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녀는 하나이 관습에 따라 세 명의 아이를 입양해 기르며 가정을 꾸렸습니다.
하와이 왕위 계승
1874년, 릴리우오칼라니의 오빠 다비드 칼라카우아(David Kalākaua)가 카메하메하 5세의 뒤를 이어 하와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즉위 후 형제자매들에게 왕족 작위를 수여했고, 1877년에는 릴리우오칼라니를 후계자로 공식 지정했습니다.
같은 해 4월, 릴리우오칼라니는 유럽 순방을 위한 외교 일정에 나섭니다. 그러던 중 오빠가 미국인 사업가들의 강압에 못 이겨 새 헌법에 서명함으로써 하와이 왕실의 권한 대부분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히 여행을 중단하고 귀국합니다.
1891년, 오빠의 죽음 이후 릴리우오칼라니는 하와이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민중의 요구에 따라 그녀는 하와이 왕정의 주권을 회복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려 했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유럽과 미국 출신 기업인들과 거주민들은 1893년 1월 14일 '안보위원회'를 조직해 여왕 폐위와 하와이 제도의 미국 병합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1월 17일 쿠데타를 감행할 것을 예상하고 미국 시민 보호를 명분으로 증원을 요청했고, 1월 16일 162명의 미국 해군·육군 병력이 호놀룰루 만에 상륙했습니다.
쿠데타와 반격의 좌절
다음 날 쿠데타가 실행되었고, 릴리우오칼라니는 이 조치의 불법성을 근거로 언젠가 왕좌를 되찾으리라 희망하며 퇴위를 강요당했습니다. 실제로 미국 정부의 조사 결과는 쿠데타가 정당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1893년 11월,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는 쿠데타 참여자들에 대한 사면을 조건으로 여왕에게 왕좌 복귀를 제안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미국 특명전권공사 앨버트 윌리스(Albert Willis)는 임시정부에 여왕의 권리 회복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894년 2월 26일 발표된 새 보고서는 오히려 쿠데타 주모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결국 1894년 7월 4일 하와이 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1895년, 반란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은 릴리우오칼라니는 실패한 반혁명 시도 이후 체포되어 징역 5년형과 5,000달러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녀는 호놀룰루에 있는 옛 왕궁의 한 방에 유폐되었습니다. 이 시기 동안 그녀는 음악 작곡에 몰두하고 회고록을 집필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침내 왕위를 영구히 포기하겠다는 서약을 한 뒤 석방되어, 1896년 하와이 공화국 정부로부터 시민권을 회복했습니다.
석방 후 릴리우오칼라니는 왕실 재산 반환을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고, 대신 연간 4,000달러의 연금과 함께 오빠에게 물려받은 사탕수수 농장의 수익권만을 인정받았습니다.
릴리우오칼라니는 1917년 11월 11일, 뇌졸중으로 인해 7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