첸나마(1778~1829)는 인도 남부 카르나타카주에 위치한 키투르(Kittur)의 여왕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에 맞서 무장 반란을 이끌며 인도 독립운동의 상징이 된 인물입니다.
용맹함으로 이름난 여왕
첸나마는 1778년 10월 23일 인도 카르나타카주의 작은 마을 카카티(Kakati)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활쏘기, 검술, 승마를 익히며 남다른 용맹함으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15세에 데사이 가문의 키투르 왕 라자 말라사르자(Raja Mallasarja)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1816년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8년 뒤에는 외아들마저 잃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슬픔 속에서 첸나마는 시발링파(Shivalingappa)를 양자로 들여 왕위 계승자로 지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영국 동인도 회사를 크게 자극했습니다. 회사는 '적법한 후계자가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시발링파의 추방과 키투르 지역의 병합을 명령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훗날 1848년부터 1856년까지 '몰수 원칙(Docrine of Lapse)'이라는 이름으로 공식화되어, 인도 전역의 수많은 번왕국을 강제 병합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식민 지배에 맞선 저항
라니('군주'를 뜻하는 칭호) 첸나마는 먼저 외교적 해결을 모색해 봄베이 총독 마운트스튜어트 엘핀스턴에게 키투르의 입장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결국 1824년 10월,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첸나마의 저항을 꺾기 위해 영국군은 1824년 10월 21일 약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키투르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영국군의 참패였고, 그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특히 영국 장교 두 명이 인질로 붙잡혔고, 첸나마는 그들의 석방을 조건으로 평화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식민지 당국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증원병력과 함께 키투르에 대한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라니 첸나마와 그녀의 병사들은 끝까지 격렬하게 맞섰습니다. 그러나 군 내부의 배신자들이 화약 보급을 고의적으로 방해하면서 패색이 기울었고, 첸나마는 부관 상골리 라야나(Sangolli Rayanna)와 함께 마지막 순간까지 분전하다가 포로로 잡혀 바일홍갈(Bailhongal) 요새에 유폐되었습니다.
옥중에서 끝낸 생애
종신형을 선고받은 첸나마는 감옥 안에서 기도와 경전 독서에 시간을 바치며 언젠가 석방될 것을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1829년 2월 21일, 끝내 자유를 되찾지 못한 채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계속된 항쟁과 비극적 결말
주군의 죽음 이후 석방된 상골리 라야나는 시발링파를 왕위에 복위시키기 위해 싸우며 영국에 대한 게릴라전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체포되어 1832년 처형당했고, 시발링파 역시 체포되면서 키투르의 저항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