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치페타, 부족을 이끈 지도자이자 협상가

우테 인디언(Ute) 출신인 치페타(1843년 또는 1844년~1924년)는 부족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남편과 함께 백인 정착민들과 여러 차례 조약 협상에 나섰습니다. 그녀는 부족 평의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

하얀 노래새

치페타, 부족을 이끈 지도자이자 협상가

치페타는 원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1843년 또는 1844년경 콜로라도에서 키오와-아파치족('평원 아파치'라고도 불림)의 일원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서부 개척, 즉 미시시피강과 태평양 사이의 원주민들이 거주하던 영토를 향한 식민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였고, 인디언 전쟁과 학살, 강제 이주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치페타가 두 살 무렵이었을 때, 그녀의 부족은 학살의 참화를 입었고 소녀는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폐허가 된 야영지에서 아이를 발견한 우테족은 그녀를 거두어 '치페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이 이름은 쇼쇼니 언어로 '하얀 노래새'를 의미합니다. 우테족과 함께 자라며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배운 치페타는 구슬 장식과 가죽 무두질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고, 아름다움으로도 이름을 날렸습니다. 음악을 연주하고 세 개의 언어로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우라예와의 만남

1851년, 어린 소녀였던 치페타는 자신보다 열 살 위의 다른 우테 부족 출신 우라예(Ouray)를 만났습니다. 위대한 전사이자 사냥꾼, 기수로 명성이 높았던 우라예는 훗날 부족의 족장이 됩니다. 우라예는 '블랙 메어(Black Mare)'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 파흘론(Pahlone)을 두었는데, 블랙 메어가 1858년에 세상을 떠나자 어린 아이를 돌볼 사람으로 치페타가 선택되었습니다.

이듬해, 열여섯 살 무렵의 치페타는 우라예와 결혼하여 네 명의 아이를 입양해 기르며 평생을 함께했습니다. 부부는 서로 깊은 신뢰와 존중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1860년 우라예가 부족의 족장이 되자 치페타를 고문이자 심복으로 삼았고, 여성의 참여가 통상 허용되지 않던 부족 평의회에서도 그녀는 남편 곁에 자주 앉았습니다. 협상 현장에서도 남편을 보좌했습니다. '우테의 평화 중재자들'로 불린 부부는 이웃, 특히 백인 정착민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평화에 대한 열망도 있었지만, 미국 군대를 상대로 승산이 없다는 냉철한 판단도 함께 작용했습니다.

치페타, 부족을 이끈 지도자이자 협상가

정착민들과의 관계

1858년 콜로라도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서부 개척으로 영토가 위협받던 원주민 부족들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었고, 백인 정착민들과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치페타와 우라예는 어떻게든 평화를 지키려 애썼습니다. 자기 민족의 일부가 백인 정착촌을 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치페타는 나흘 동안 말을 몰아 달리고 건니슨(Gunnison)강을 헤엄쳐 건너 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그녀 덕분에 한 아이와 그의 어머니는 목숨을 건졌고, 그들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우라예 족장과 그의 아내는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집 전체를 내어주었고, 바닥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었으며, 탁자 위에는 등잔이 놓여 있었고, 화덕에는 불이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우리라예 부인은 우리를 위해 눈물까지 흘려 주셨습니다."

1861년 2월 콜로라도 준주가 설립되었습니다. 치페타의 도움 아래 우라예는 콜로라도 정부와 조약을 협상하는 대표단에 참여하여 우테족의 사냥터와 성역을 지키려 애썼고, 콜로라도 주지사와의 회담에서는 통역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1863년 체결된 코네호스 조약(Treaty of Conejos)으로 우테족의 영토는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마니투 스프링스의 수원지와 성산 파이크스 피크(Pikes Peak)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땅의 상실, 그리고 원주민들에게 정착과 농경을 강요하고 말 경주를 금지하며 기독교로의 개종을 요구하는 콜로라도 정부의 압박은 갈등을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1879년 인디언 담당관 네이선 미커(Nathan Meeker)와의 충돌이 폭발하면서 '미커 학살'로 불리는 반란으로 번져, 우테족이 백인 남성 열한 명을 죽이고 여성과 아동 다섯 명을 납치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반란에 자신들의 부족이 가담하지 않았음에도, 우라예와 치페타는 인질 석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우테 강제 이주법

1880년, 배정받은 땅에서 사냥감이 부족해지자 우테족이 코네호스 조약으로 잃은 영토에서 계속 사냥을 이어갔고, 이에 치페타와 우라예가 이끄는 대표단이 워싱턴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두 가지였습니다. 전년도 우테족 반란에 대해 의회에서 증언하는 것과, 우테족 보호구역 이전에 관한 조약을 협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차로 워싱턴에 향하던 길에 그들은 미커 학살의 공범으로 오인한 백인 정착민들의 분노에 찬 무리에게 거의 린치당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워싱턴에서 치페타는 대표단의 정식 일원으로 인정받아 의회에서 직접 증언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미커 학살 이후 한층 불리해진 처지 속에서 진행된 조약 협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백인 정착민들과 맺은 조약에 대해 우라예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인디언이 정부와 맺는 합의는, 수많은 화살에 꿰뚫린 버팔로가 사냥꾼과 맺는 합의나 다름없습니다. 버팔로가 할 수 있는 것은 드러누워 굴복하는 것뿐입니다."

치페타, 부족을 이끈 지도자이자 협상가

1880년 우테 강제 이주법(Ute Removal Act)은 우테족에게서 콜로라도의 마지막 땅마저 빼앗아 유타주의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우라예는 새 보호구역을 보지 못한 채 워싱턴 귀국 도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반면 치페타는 현혜로운 여성으로 존경과 신뢰를 받으며 우테족의 지도자로서 계속 남았습니다.

인디언 시민권법

우테족과 치페타는 척박하고 관개 시설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보호구역에 정착하여 정부가 제공하는 배급품에 의존하는 생활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치페타는 보호구역 안에서 깊은 존경을 받았고, 유일한 여성으로서 모든 부족 평의회 회의에 꾸준히 참석했습니다.

치페타는 보호구역에서 재혼하여 늙어가는 동안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1924년 8월, 여든 살 무렵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미국 대통령 칼빈 쿨리지(Calvin Coolidge)가 원주민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한 인디언 시민권법(Indian Citizenship Act)을 공포한 지 겨우 두 달 뒤의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