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압박과 영국의 독립 약속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우세를 장악해 가던 시기, 영국은 인도인들에게 독립을 약속하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1942년 3월, 영국 정부는 크립스 위원단(Cripps Mission)을 인도에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이 위원단이 제시한 안이 수용될 경우 나라가 여러 조각으로 분할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인도 국민회의는 크립스 미션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수바스 찬드라 보스와 자유 인도군
한편으로는 영국의 술수가 멈추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승전 기세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국민회의의 우유부단하고 잘못된 노선에 실망한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h Chandra Bose)는 자유 인도군(Azad Hind Fauj)을 조직하여 버마 방면에서 인도로 진입했습니다. 때로는 자유 인도군의 폭격기가 델리까지 닿을 것처럼 보이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국민회의의 결단
그런 상황을 상상하기만 해도 국민회의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에 국민회의는 "수바스 보스가 인도 공격의 도덕적 명분을 잃도록, 영국은 즉각 인도에서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42년 8월 8일 밤, 국민회의는 봄베이(현재의 뭄바이)에서 '인도 떠나라(Quit India)'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간디는 이 회의에서 "싸우거나 죽으라(Do or Die)", "지금 아니면 영원히 없다(Now or Never)"와 같은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비폭력의 히말라야라 불리던 지도자들의 마음속에서도 비폭력이라는 산이 완전히 녹아내린 듯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지도자들의 대규모 검거
국민회의가 이토록 강경한 언사를 사용하자, 정부는 8월 9일 해가 뜨기 전에 간디, 네루, 파텔 등 거의 모든 핵심 지도자들을 체포했고, 국민회의를 다시 비헌법적 단체로 규정했습니다. 간디와 사로지니 나이두는 푸네의 아가 칸 궁전에 연금되었고, 파텔, 네루, 마울라나 아잘드 등의 지도자들은 아메드나가르 요새에 연금되었습니다.
지도자 없이 스스로 일어선 대중
지도자들이 체포되자 대중은 반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국민회의는 1942년 운동을 위해 별다른 준비도 하지 않았고, 운동을 진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선언자들은 감옥에 갔지만 대중이 자발적으로 운동을 이끌어간, 그런 운동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철길을 뜯어냈고, 기차역을 습격했으며, 우체국과 정부 청사에 불을 질렀습니다. 전화와 전신 선도 끊어졌습니다.
나라 전체가 비폭력의 길을 버리고 폭력의 길을 택한 듯 보였습니다. 경찰이 시위대를 통제하지 못하자 군용기가 폭격까지 가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시위대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파텔의 회고
사르다르 파텔은 감옥에 들어갈 당시 이미 병든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수체타 크리플라니(Sucheta Kriplani)가 바깥에서 약을 보내주곤 했습니다. 1945년, 3년 만에 감옥에서 나온 뒤 사르다르 파텔은 이 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국령 인도 역사상 지난 3년간 일어난 것과 같은 격변은 결코 없었다. 우리는 국민들이 보여준 반응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