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장 드 라 퐁텐(Jean de La Fontaine) 전기 — 17세기 프랑스 최고의 우화 대가, 그의 삶과 문학

장 드 라 퐁텐(Jean de La Fontaine) 전기 — 17세기 프랑스 최고의 우화 대가, 그의 삶과 문학약력 — 장 드 라 퐁텐(Jean de La Fontaine, 1621–1695)은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그는 구전 전통과 그리스의 우화 작가 이솝에게서 물려받은 소재를 바탕으로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우화들을 남겼으며, 프랑스어와 시 형식에 대한 탁월한 숙련을 보여주었습니다. 우화 외에도 이야기(콩트), 시, 희곡, 서간문, 연설문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지만, 그의 작품이 언제나 존경과 우정만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소 자유분방한 성향의 시인이었던 그는 인생 말년에 평생의 야망이던 프랑스 아카데미(Académie française)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초기 이야기 작품들을 공개적으로 부인해야 했습니다.

장 드 라 퐁텐의 시작

라 퐁텐은 1621년 7월 8일 샤토티에리(Château-Thierry)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물과 숲의 관리인이자 사냥대장이었고, 어머니는 푸아투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교육을 시작했지만 그리스어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20세 무렵에는 파리의 오라토리오 수도회에 들어갔으나 18개월 만에 학업을 접었습니다. 다만 그곳의 고요하고 평온한 분위기는 그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안겨 주었는데, 안타깝게도 지도자들이 권장하는 독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장 드 라 퐁텐(Jean de La Fontaine) 전기 — 17세기 프랑스 최고의 우화 대가, 그의 삶과 문학1647년 마리 에리카르(Marie Héricart)와의 행복하지 못한 정략결혼 이후, 1653년 아이가 태어난 뒤 라 퐁텐은 법학을 공부하여 1649년 파리 고등법원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1652년에는 아버지의 사망으로 물과 숲의 관리인 직위를 물려받았으나(1672년에 매각), 힘든 실무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위대한 우화 작가는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파리에서 그는 오랜 친구 마크루아(Maucroix)를 비롯해 탈르망 데 레오 형제, 퓌티에르(Furetière) 같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고, 이후 문학 모임 '라 타블 롱드(La table ronde)'에 참석하며 교류를 넓혔습니다.

말레르브, 방스라드, 부아튀르의 작품에 매료된 그는 처음에는 운문과 서간문, 발라드를 연습했고, 1654년에는 희곡 《유누크(L'Eunuque)》, 1659년에는 희극 《클리메네(Clymène)》와 시 《아도니스(Adonis)》를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재능을 알아본 재무총감 니콜라 푸케(Nicolas Fouquet)가 그의 후원자가 되었고, 라 퐁텐은 감사의 표시로 《보 성의 몽상(Le Songe de Vaux)》, 《국왕에게 바치는 송가》, 《보의 님프들에게 바치는 애가》를 헌정했습니다. 그러나 푸케가 실각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라 퐁텐은 후원자에게 충성을 지켰고, 이 때문에 콜베르의 미움은 심지어 루이 14세에게까지 미치게 됩니다. 후원자를 잃은 그는 한동안 리모주에서 잊힌 존재처럼 지내야 했습니다.

라 퐁텐의 이야기와 우화

1664년 파리로 돌아온 라 퐁텐은 몰리에르, 보알로, 라신과 친분을 맺습니다. 그는 1674년까지 자신의 후원자였던 부용 공작부인을 위해 보카치오와 아리오스토에서 영감을 얻은, 다소 자유분방한 경향의 이야기·단편 모음집을 출판할 기회를 얻었고, 1668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우화집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솝, 파이드로스 등 고전 작가들의 우화를 원용한 라 퐁텐은 12,000행에 달하는 방대한 운문으로 수많은 우화를 새롭게 탄생시켰습니다.

"나는 동물을 통해 인간을 가르친다"라고 말한 그는 대중적이면서도 소박한 장르로서 우화의 위상을 확립했습니다. 부용 공작부인 다음으로는 1673년까지 오를레앙 공작부인의 저택에 기거했고, 이후 20년 동안은 라 사블리에르 부인의 살롱에 머물렀습니다. 1678년에는 첫 번째 우화집 4권에 이어 두 번째 우화집을 출판했습니다.

장 드 라 퐁텐(Jean de La Fontaine) 전기 — 17세기 프랑스 최고의 우화 대가, 그의 삶과 문학라 퐁텐은 고대 전통에서 이어져 온 우화의 소박하고 대중적인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이를 세련되면서도 자연스러운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예컨대 제1권의 운문·산문 혼합 우화 〈소만 하고 싶었던 개구리〉는 전통적인 요소들(인간의 특성을 지닌 동물 캐릭터, 단순한 어휘, 대화체 형식, 명료한 교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간결함에도 불구하고 생동감, 아이러니, 리듬감과 같은 서사적 완성도 면에서 혁신적입니다. 도덕적 메시지 자체는 진부할 수 있으나, 개구리 이야기를 당대 사회의 권력자들과 유머러스하게 연결한 지점에서 이 작품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프랑스 아카데미 입회

마침내 1684년, 라 퐁텐은 콜베르의 뒤를 이어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됩니다. 사실 3년 전에 이미 지원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1683년 9월 콜베르가 사망하자 보알로와 라 퐁텐이라는 두 후보가 경쟁했습니다. 62세에 이룬 이 자리는 그의 평생 야망이었습니다. 다만 의석을 차지하려면 전임자를 찬사해야 하는데, "그 사람에게 원한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카데미 학자들은 보알로보다 라 퐁텐에게서 더 나은 자질을 발견했고, 첫 번째 표결 역시 라 퐁텐에 유리하게 진행되었지만, 루이 14세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이 선출 결과를 수용하지 않았고, 왕은 두 사람이 동시에 입회하기로 결정합니다. 다행히 1684년 4월 새 의석이 하나 비면서 보알로와 라 퐁텐은 함께 아카데미에 입회했습니다. 콜베르에 대한 찬사는 신속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입회 과정에서 라 퐁텐은 의회 앞에서 자신의 외설적인 이야기 작품들이 지나쳤음을 인정하며 이를 공개적으로 부인해야 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지위를 소중히 여겨 모든 회의에 성실히 참석했고, 아카데미에서 보알로, 페로, 퓌티에르를 다시 만났으며, 살롱 문화의 중심에서 세비녜 부인, 라파예트 부인 같은 유명 문인들과 폭넓게 교류했습니다. 또한 당대의 큰 논쟁이었던 '고대파와 근대파 논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고대파를 열렬히 옹호했습니다.

장 드 라 퐁텐의 죽음

장 드 라 퐁텐(Jean de La Fontaine) 전기 — 17세기 프랑스 최고의 우화 대가, 그의 삶과 문학병이 찾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71세였습니다. 1693년 1월 라 사블리에르 공작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었습니다. 기운은 바닥났고, 쾌락에 대한 욕심은 물론 삶에 대한 애착마저 잃어갔습니다. 그는 독서에 몰두했고, 특히 복음서를 읽었으며, 사제들과 신앙에 관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푸제 신부는 설득력 있는 대화로 라 퐁텐을 고백으로 이끌었고, 나아가 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방에서 공개 고백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 작품들을 부인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종교적이고 경건한 글만 쓰겠다고 약속했고, 마침내 종부성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상태가 호전되자 그는 다시 아카데미 회의에 참석했고, 1694년에는 우화집 제12권을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1695년 2월 어느 저녁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고, 그해 4월 1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참고문헌

- Roger Duchêne, Jean de La Fontaine (전기). Fayard, 1995.

- La Fontaine : 장 드 라 퐁텐의 우화. Poche, 2002.

- Olivier Leplâtre, 라 퐁텐 우화에 나타난 권력과 담론. PUL, 2002.